수호천사 루이와 인간 에단AU
이 글은 픽션이며 실재하는 종교와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추천 BGM : Rebecca Sugar - Time Adventure
And we'll happen again and again
'Cause you and I will always be back then
햇빛 아래에서 축제의 잔여물은 낱낱이 드러난다. 반짝이는 종이 조각들, 푹 익어 단내를 풍기는 음식들, 흥분한 벌레들, 곳곳에서 풍기는 휙 도는 향기. 그것들은 한때 그랬듯 빛나거나 유혹적이지 못하고, 거리의 청결함을 한껏 실망시키고 있다. 에단이 군인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모르는 몇 사람이 지켜보았다. 길을 찾지 못한 것인지 아직까지도 들어갈 곳에 들어가지 않고 어느 문 앞에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내일 무슨 일이 찾아올지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느 순간 돌아가기를 멈춘 것일까? 에단은 그 중에 어제의 악사가 있는지 찾아 보지만, 법정으로 이송되는 도중이므로 먼 곳을 훑을 수는 없었다. 군인들은 말이 없다. 에단도 그랬다.
천사와 섰던 텅 빈 재판장은 이제 몇몇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교수형의 때까지 점점 채워질 터였다. 그들은 어떤 일을 기대해서 이 곳에 섰나? 정의를 판가름하는 일을? 군인들은 에단과 그의 소지품을 다른 무리에게 넘기고 물러갔다. 복장과 태도로 미루어 보아 관원일 테다. 그들이 에단에게 밧줄 대신 제대로 된 수갑을 채웠다.
기사는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정해진 수순을 순종적으로 밟는 일이 흥미로울 리가 없다. 하물며 목이 매달리는 과정을 하나하나 상상하여 대비하는 일은 머저리 같은 짓이다. 대신에 에단은 관원들이 든 그의 검을 빼앗아 모두 무력화시킨 뒤에 찾을 퇴로 따위를 눈으로 살핀다. 그들에게는 훈련된 기사를 상대할 만한 긴장감이 없어 보였다. 그는 천사와 걸어온 길—비록 캄캄한 밤길이었지만—을 기억했다. 그를 추적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왔던 길로 내달려, 개천에 도달하면 반대편까지 헤엄칠 수 있다. 바다를 건너면 고국에 도착할 것이다. 상상은 먼 곳으로 뻗어 나간다. 그렇지 않더라도 서쪽의 중립국, 혹은 루이가 왔다고 주장할 만한 먼 나라까지 도망치면 된다……. 에단은 신중하게, 몇 번이나 이 과정을 되감았다. 이제는 배를 얻어 바다를 건널 때의 희미한 비린내까지도 생생하게 맡을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든 생각도 아니었다. 루이와 만난 후로 에단은 점차 자주 도주에 대해 상상했다. 천사의 제안은 모조리 거절했음에도 그렇다. 에단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렇게 윽박지른다. 그래서 어쩔 건가? 그 뒤에는? 기사가 아니더라도 주군을 지킬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만, 첫째로는 구차하게 살기 위한 발버둥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나? 버려진 개가 될 텐가? 무엇을 위해?
에단은 무언가를 벗어난다는 생각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옳지 않은 의견과 불합리를 그의 길에서 치워 둘 뿐이다. 이 재판은 완전한 불합리성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비록 손익 계산이 오갈지언정 세계는 그가 빼앗은 목숨만큼 저울에 매달아 동등한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준이 말하는, 소위 영웅이 된다면 이 계산을 교묘하게 비켜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사회를 올바르게 구동하기 위해 합의된 법이다.
에단은 살인을 후회한 적이 없다. 도망친 곳을 상상하면 루이가 있다. 언제건 살기 위해 천사의 도움을 빌 생각은 없지만 그가 있기에 에단은 머릿속에서 줄곧 도망치는 일을 반복했다.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에단은 독거미 성운을 생각한다. 하늘에 있는 거미 같은 별구름이라니, 드문드문 이름 붙은 별자리나 은하수를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대체로 길을 가리키기 위해 있으므로, 굳이 걸음을 멈춰 감상한 적은 없다. 루이가 보는 하늘은 무언가 다를지 모른다. 그는 아무래도 천사이니까. 지금쯤 이 땅을 벗어난 어느 공중에서 성운을 바라보고 있을 것도 같다. 태어나는 어린 별들을.
루이.
“따라서 교수형을!” 소리는 느리게 귀에 들어왔다. 에단은 고개를 들었다. 재판장 한가운데다. 많은 이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 적대와 혐오감, 어쩌면 동경, 즐거움, 매료된, 그런 눈길들이 일제히 기사를 향해 꽂힌다. 에단은 더 이상 존재 바깥에 있지 않다. 그는 강제로 끌려 나와 심판의 객체로 섰다. 살인에 대한 엄중한 대가다. 에단은 그들이 그다지 교훈을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닿는다. 심지어 죽은 이의 가족들이 가장하는 아픔 또한 가짜다. 그를 핥는 시선들은 정의 구현을 위한 노골적이며 외설스러운 고통, 타인의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보기 원한다. 이 죄인의 목숨을 걸고, 모종의 희열을 느낄 테다. 모조리 하찮고 역겨운 놈들 뿐이다. 어울릴 가치조차 없으며 가능하다면 다 죽여 버리는 게 낫다.
에단은 눈을 감았다. 재판장의 흥분한 소란 가운데에서 그는 허리까지 진 나무 그늘과 끝도 없는 벌판, 부르면 돌아 보는 그의 천사를 생각한다.
♣♣♣
루이가 떨어진 곳에는 앞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들어차 있었다. 아직 생성되지 않은 우주 속에 추락한 것 같다. 어떤 공간조차 되지 못한, 관측 외의 지점에. 대천사는 주의하며 몸을 움직였다. 감지되는 건 없다. 그를 인도한 천사는 뒤따라오지 않고 사라진 것 같지만, 설마하니 큰 위험에 빠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렀는데 미안하지만 이 몸은 이만 가야겠네.” 버릇처럼 그는 목소리를 냈다. 소리는 흔들리지도 울리지도 않는다. “임무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일세. 보내 주게.”
“네놈이 실패한 것 말인가?” 루이는 멈춘다. 허공에 천천히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눈매가 떠오른다. 보는 일만으로도 그만 병들 것 같은 깨끗한 눈동자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틀림없는 본인이다. 이곳에 같이 떨어졌던가? 어디까지 알아낸 거지? 실수한 부분을 전부?
에, 에단. 대답은 헛디뎌 넘어지듯 튀어나왔다. 나는…
에단의 굳은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작은 웃음소리가 불현듯 터져 나온다. 아, 널 놀리는 게 이렇게 재밌네. 미안, 루이. 깔깔대는 형상은 금세 부드러운 인상의 인간으로 변했다. 싸늘한 허공에는 점차 창조의 찌꺼기 같은 것이 들이찬다. 루이는 꽉 쥔 주먹에 힘을 풀었다. “다신 하지 말게.”
“그렇지만 너도 알지? 그도 나의 일부라는 걸.” ‘전체’는 말했다. 루이는 대답 대신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은 루이와 언젠가 함께 명계 구경을 한 뒤로 웬 여성의 형상을 내내 고수했다. 그 인간은 동생 둘을 잃었는데……. 긴 이야기다. 신은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루이의 의견을 묻자면, 어울리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하고 많은 것 중 네가 이럴 줄은 몰랐네.” 주인은 다정한 얼굴을 하고 루이의 양 볼을 감쌌다. 아니, 사실 알고 있어. 루이에겐 그런 결함이 있지.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한 투다. 루이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알고 있다. 천사는 볼멘소리를 냈다. 이 몸이 완벽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완벽보다 살짝 과하지. 그게 재미있는 부분이야. 신은 선선히 이 투정을 받아 준다. 그들은 결국 백 삼십 칠억 년 가량을 같이 지내 왔다. 그녀의 통찰하는 특성상 싸운 일은 없지만, 달리 새롭게 실망할 거리도 없을 테다. 장미꽃을 선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미처 만들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어려웠다. 루이는 이런 곳에 소환된 이유를 가늠해 본다. 그저 이 순간 신이 창조 이전에 머물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루이가 벌인 일을 보고서는, 한동안 버려 두길 원한다던가.
루이는 불현듯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본다. 방금까지 놀리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즉각적인 변화다. …왜? 그가 혹시 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걸까? 완벽하지 못한 게 그리 슬펐던가? 용서하는 일이 어려움을 줬을까?
“왜, 왜 우는가? 이 몸이 미안하네. 더 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천사는 안절부절하며 말을 흐렸다. 조심스레 소매를 들어 물기를 닦으니 주인이 고개를 떨군다. 네 마지막을 보고 와서 그래. 별 것 아니야.
그녀는 어느 때부터 좀체 이 순간을 살지 못했다. 루이는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애썼지만 신은 어딘가 지겨운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어쩌면 작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이 일의 연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은 선형적 시간 속의 모든 면을 동시에 바라보고, 여기서는 대천사조차 아주 벗어나질 못했다. 루이는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은 많은 일의 책임을 스스로 졌을 따름이다. 굴러가는 세계는 끊임없이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그들 가운데 있는 찌꺼기처럼. 어쩌면 전체의 눈에는 일부의 결함만이 계속 보이는지도 모른다.
루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희미한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천사를 구성하는 멜로디가 느리게 주변을 채운다. 어떤 음악에도 속하지 않은 음이다. 작고 약한 형태를 한 신은 루이의 눈을 올려다본다.
“이 모습을 하고 있으면 좋은 점이 있어.” 무언가? 대천사는 본래 그 인간이 어땠는지 기억해 본다. 확실히 눈에 띄긴 했으나 그저 인간이라는 감상이 떠오른다. 왠지 모든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 그의 주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애와 같아질 순 없지만.
이것 봐.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읽을 수 있는데도 굳이 말을 하고 있잖아. 뭔가를 흉내 내고 싶은 건가 봐. 뭔가… 하등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작은 입술이 말한다. 루이는 노래를 멈추고, 그녀가 이만 손을 놓아오는 것을 도로 잡지 않았다. 그녀는 루이에게서 다소 멀어진 채 등을 돌렸다.
“저, 이 몸은…”
“가 봐야 하겠지?” 루이는 크게 저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천사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루이는 그녀의 울적함을 느낀다.
“아, 그리고…”
나를 거스르는 게 맞아. 잊은 게 아니라면, 네 목적과 맞지 않는 일이야. 그것 하나가 내 모든 작품을 무너뜨릴걸. 신은 다시 한 번, 루이의 말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뚝 끊었다. 꽤 주인다운 대답이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든다. 루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떨어진 뒤로 말도 안 되는 떼밖에는 쓰지 않은 것 같다. 신은 이보다 더 나은 일을 기대했을 것이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며 엉망진창이 되기보다는, 대천사에 걸맞는 권위를 바라는지 모른다. 성자에겐 축복이고 악인에게는 심판이 되는, 태초의 관조자로서 루이를 보냈을 터인데.
하지만… 처벌을 받진 않겠지. 설마 그녀가 그에게 그런 짓을 할까? 백 삼십 칠억 년간 공전하던 태양을? 그러나 요사이의 신이라면 모를 일이다. 루이가 저지른 짓은 꽤 심한 것 같다. 루이는 양 손을 모으고 에단을 생각한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면 충분히 돌려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죽기 전에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있겠다.
천천히 익숙하게 불쾌한 기분이 든다. 그를 만들 때에 계산되지 않은 고통일 것이다. 신은 천천히 루이를 뒤돌아본다. “나는 부탁을 하면 안 돼.”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유순한 눈을 동그랗게 감싼다. 그 눈이 루이를 소멸시키고 싶은지 아니면 용서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루이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이 몸에게 말해 보게.” 신은 고개를 젓는다. 만물의 창조주가 그의 종에게 부탁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건 의미가 없어, 루이. 모든 것의 결말을 아는 여자는 그렇게만 답한다. 천사는 그에게 주어진 날개를 천천히 꺼냈다. 루이를 거룩하며 아득한 존재로 만드는 증거다. 그대가 느끼는 것 중 의미 없는 일은 하나도 없네.
자신에게 화가 났다면 루이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의 인형이기 때문은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줄을 알았음에도 금방 돌아가질 않은 건 실수였다. 친구로서 루이는 거기 섰다.
손을 어깨 위에 대자 마치 거대한 중력에 짓눌리듯, 지극한 회한이 전해져 왔다. 루이로서는 그만 압사당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나는 가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신은 이제 말하지 않고 생각을 뻗쳐 왔다. 루이….
백 삼십 칠억 년, 그리고 이제 지나갈 수백억 년의 세월이 신 앞에 있다. 루이는 어째서 신의 말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는지 상기한다. 이는 그가 사랑의 천사인 탓도 있다. 주인이 루이를 만들고 한 첫 마디도 그랬다. 너는 빛나니까 사랑하기 좋겠다. 정말 사랑해. 그 어떤 소름 끼치고 이해할 수 없는 악을 마주할 때라도 그녀가 루이 옆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루이는 대천사치고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하나의 할 일만이 주어졌을 따름이다. 루이는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들 모두 인간 같은 육신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는 말마따나 하등한 흉내에 그칠 따름이다.
“그대를 행복하게 하고 싶었네.” 루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에 실패하는 건 이번 한 번뿐도 아니다. 이를 깨닫고 대천사는 웃을 것도 같다. 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트릭이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트릭. 나도 알아. 루이, 가지 말아. “이제 알겠군.” 루이는 낮은 숨을 내쉰다.
미안해. 정말 사랑하네. 그대 같은 이는 정말 하나뿐이었어. 신은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마지막으로 날개를 보여 달라고 했다. 루이는 그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 주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를 넘어 행성 크기의 눈부신 백색이 나풀댄다.
난 이 순간을 수천 번이나 봤어. 준비를 했지. …그런데도 어렵구나. 늘 완벽한 것보다 조금 과해서 넘쳐흐르지. 나의 태양. 나도 사랑해. 루이. 정말이야. 대천사는 마지막으로 신이 들어올리는 팔을 본다. 암흑이 핑핑 돈다. 그 곳에도 언젠가 무언가 들어찰 것이다. 팽창하는 우주의 속도로, 찬송이 끝날 때까지. 안녕.
예견된 강림의 날이다.
♣♣♣
“마지막으로 전할 말을 물어볼 테니, 신중히 생각해라. 저 중에 가족이 있다면 이야기해도 좋다.” 두건을 든 집행관 앞에서, 에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겨움을 느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이를테면 무대의 뒤쪽이다. 양 손과 발은 묶였고 유언 따위를 물어보는 이와 함께였다. 모두 거대한 쇼다. 보는 이들이 다만 눈물을 흘리거나 화를 내게 하는 그런 류의 쇼다.
에단은 잠시 교수대를 바라본다. 웅성대는 이들 속에 준이나 테오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의 좋은 일이다. 신년을 맞은 것을 축하하네. 작은 인간이여. 루이의 목소리가 가벼이 떠다녔다. 신년맞이 교수형은 확실히 뜻 깊게 느껴지기야 하겠다.
“이 몸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뻔뻔스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에단은 곁에 있는 집행관을 무시하고 휙 돌았다. 광명의 천사는 늘 그렇듯 아름답게 공중에 들려 있다.
“잘도 사라졌더군. 한 번의 쟁취 후에 도망치는 그런 류의 쓰레기인 줄 알았다.” 루이는 후후 웃는다. 나도 돈 조반니 이야기를 좋아하네. 참회하는 부분이 일품이지. 접힌 눈에서는 빛이 쏟아지는 것 같다. 에단은 눈을 깜빡인다. 그런 쓰잘데없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농담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어째서 두서없는 말이 쏟아지는지 모를 일이다.
시간은 어느 순간 멈춘 듯이 보였다. 어떤 상대적 감각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루이의 몸에서 떨어진 듯한 깃털이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천사는 에단의 시선을 따라 멈춘 사물들로 눈을 돌리고는, 아, 맞아. 이 몸은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네. 멋진 묘기지. 했다.
먼지조차 그들을 위해 멈춰 있다. “그래서, 결국 죽으러 가는군.” 루이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다. 초록 눈은 좀전의 에단과 같이 교수대를 바라보았다.
“그래.”
“즐거운가?”
“즐거워야 하는가?” 에단은 언젠가처럼 되묻는다. 천사는 또 웃었다. 여기서 정말 즐거운 이는 그밖에 없는 듯했다. 기다려 왔지 않은가. 내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는 하지 말게.
“기억한다.” 에단은 딱히 감사 인사를 돌리지 않는다. 다만 간절하게 느껴지던 순간을 한 차례 더듬었다. 그렇게 애원한 뒤 인간을 살려서 무얼 하겠다는 작정일지 알 수 없다. 수호천사의 직무와는 다른 느낌이다. 직무였다면 그를 향해 명령해야 했으므로. 그리고 어떤… 존재 이유를 제시해야 했다. 에단은 대신에 천사가 그런 식으로 일을 혼란하게 만드는 데에 질렸다. 마냥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믿어야 하는 것처럼. 꼭 살길 바라야 하는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어떤 대화는 영영 이어질 것 같다가 곧잘 그렇게 끊겨서 이상한 불안감을 자극한다. 모든 게 끝난다는 감각. 루이의 눈은 여전히 올가미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똑같은 말이다. 마지막 말이 인간의 일생을 바꾼다면 정말로 인간들은 유언을 열심히 생각해야 할 것임이 틀림없다. 다만 실제로 마지막 말들은 형편없다는 게 다르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에단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루이가 천천히 땅을 향해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의 맨발이 부드럽게 돌바닥을 밟았다. 언제고 입맞추고 싶은 발이었다. 에단이 선 곳과는 세 걸음 정도의 거리다. 발목이 묶인 에단은 걷기가 힘들었다. 대신에 천사가 땅 위를 걸어온다. 한 걸음, 두 걸음, 왈츠를 추기에 좋은 거리에서 루이는 에단을 보호하는 것처럼 손을 든다.
“내가 왜 기분 좋은지 아나?” 알 리가 있나.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생물이다. 에단은 더없이 연약하게 느껴지는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다. 루이는 누군가 들을 것처럼 주위를 둘러 보는 체하더니 한쪽 귀에 속삭인다. …심지어 이런 순간에도 말이야. 그대의, 아주 작은 기쁨이 전해져서 그렇네.
에단의 속은 지느러미를 삼킨 것처럼 울렁였다. 루이는 그대로 뺨을 마주 대어 왔다. 그건 좋은 일이지. 작은 소리지만 에단이 듣기에는 충분했다. 고개를 든 루이는 묶인 손목을 안타까운 듯 만졌다. 수갑은 손뼈를 거의 부숴야만 비틀어 빼낼 수 있는 정도로 강하게 잠겨 있었다. 루이는 파래진 손목에다 입을 맞췄다.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아.”
“어째서인가?”
“그대의 수호천사로서 실패했기 때문이네.”
에단으로서는 그가 실패하든 말든 크게 상관 없었다. 그가 대꾸하려는 찰나에 루이가 쉿,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전부 미안하네. 내가 바란 건…. 루이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있어. 아마도 수호천사로서 평생은 못 할 것 같네.
그 평생은 수십 분 내로 끝나려는 참이다. 에단은 눈썹만 꿈틀거렸다. 그런 말을 갑자기 던진대도 무슨 거대한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에단은 구걸하는 인간도 모든 것을 바치는 인간도 아니었다. 끊어지면 끊어지는 대로 조용히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이를 대단한 연기처럼 해내는 천사는, 모든 일을 한층 싸구려 비극으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죽음에 구구절절 시를 짓는 인사들처럼 말이다.
적어도 루이의 포옹은 따스했다. 묶인 죄수는 균형을 잡기 위해 그에게 체중을 실어야 했다. 천사는 가뿐하게, 그의 말마따나 작은 인간을 품는 것처럼 끌어안는다.
“그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이제 알겠네. 나는 언제나 어느 정도 실패하고 있었지.
날개는 그늘을 만들어, 에단이 이따금 상상하던 것처럼 캄캄한 어둠을 만든다. 있던 자리에서 바닥이 무너져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 시절이 있다. 여기, 이 자리에서는 천사가 그를 붙들고 있다.
할 수 있다면 영혼까지 엉겨 붙고 싶다. 그렇다면 죽어서도 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불과 지난 밤이다.
“어쩌면 도망가기를 바라는지 모르지.” 에단은 답했다. 목소리는 날개 안에서 조금도 새어나지 않을 것처럼 울렸다. 에단. 루이가 이름을 부른다. “나의 주군에게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그의 기사가 되고 싶은지도. 여기서 죽느니 그분을 지키다 전장에서 죽기를 바란다. 이안… 나의 왕이 군림하여 통치할 때 그 옆에 있어야 한다.”
“에단.”
“이 웃기지도 않은 쇼는 그만두고 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를 모조리 참수하고 싶다. 그대로 귀국하는 게 낫겠군. 기사단은 동절기 훈련이 필요하므로 단장의 귀환이 시급할 것이다.”
루이는 그의 입을 다시 다물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노력은 미약했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왕족의 권위를 새기길 바란다. 이를 위해 거처 자체를 궁전으로 옮겨야겠지.” 에단은 잠시 떠올린다. “…그 전에 가을 풍경을 한 번 더 보고 싶군.” 분홍빛이 융단처럼 깔리기 시작하는 비탈길을.
“에단 아스터 버틀러.” 에단은 비로소 어둠 속에서 루이의 얼굴을 본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가 아는 것은 기회가 이미 지났다는 사실 뿐이다. 축축한, 눈물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적들이 주제를 알기를. 가능하다면 사공들이 하여금 항상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길. 농부들이 부요하기를. 신부들이 염려 없이 잠들기를. 아이들은 건강하기 바란다.”
“나는….”
“말하지 마라.” 기사는 막아 선다. 심장은 점차 불규칙하고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종착지에 다다른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거기서는 멈출 수 없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느냐 그만 나뒹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너와 창백한 별을 보길 바란다.” 천사가 우주를 본다면 에단은 그 옆얼굴을 보면서, 세상에 생명이 가득 찬다는 게 어떤 기쁨인지 헤아릴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천사는 어김없이, 항상, 평생, 약속한 대로 있어야 했다. 언제든지 믿을 수 있도록. 에단이 그의 신을 부를 수 있도록. 루이는 이제 확실히 울고 있었다. 몸이 크게 들썩였다. 차츰차츰 손끝부터가 차가워진다. 소원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안 그래.
미안하네. 에단. 선한 인간. 루이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그가 만든 날개 고치도 바람에 나는 것처럼 흔들린다.
수갑을 풀어, 루이. 에단은 할 수 있는 한 정중하게, 부탁하는 음성을 내어 본다. 묶인 채로는 도무지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손짓 한 번에 모든 일을 해결하고 으스댈 천사는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다. 바라는 걸 말하라 하지 않았던가. 에단은 천사에게 심히 따지고도 싶다.
루이는 차츰차츰 진정했다. 에단은 “수갑.” 하고 한 번 더 말했지만 무시당한다. 대신에 열 오른 이마가 맞닿고, 에단은 속눈썹에 작게 맺힌 물방울을 본다.
“그대는 아마 잘 해낼 걸세…. 스스로 좋은 일을 잔뜩 만들 수 있을 거야. 나는 알 수 있네.” 다정한 목소리다.
“말하지 마.” 에단은 벌써 두 번째로 천사의 말을 끊어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체할 수 있다. 다가올 죽음 따위를. 그러면 평안을 가장할 수 있다. 그들은 영원히 근처를 빙빙 돌면서 서로를 시험해볼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천사는 그런 일에 도무지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는 빌어먹게도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그것도 에단이 미처 이 꼴을 못 보고 요절하기 전에 말이다.
그렇다. 가장 끔찍한 점은 에단이 여기서 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루이는 영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안온한 그의 날개 아래에서 조용히 웃는다. 그대가 매일 나를 생각해 주면 좋겠네. 아주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인가? 생각해 봤지……. 수천 번을 의심했어.
무엇인가 곧 폭발할 것 같다. “나는,” 에단은 침을 삼켰다. 차라리 기절하는 게 낫다. 여길 뛰쳐나가야 원이 풀리겠어. 네놈이 꼭 이뤄야 해. 그러면 이 일은 아예 없던 걸로 하지. 다신 얘기하지 않도록. 수많은 말들이 혀를 거치지 않고 끊어졌다. 마치 거대한 힘에 굴복하는 듯했다.
맞댄 이마 사이로 루이는 에단을 물끄러미 추억하듯, 천사다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그대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같네. 그게 나를 존재하는 사명으로부터 떨어뜨리는군. 이제 헤어져야겠어. …사랑하고 있네. 가벼운 인사다.
몸은 두려운 말을 들은 것처럼 떨려 왔다. 에단은 길게 끈 작별을 예감한다. 생각해 보면 항상 죽기 위해 헤어지는 준비를 했다. 감옥에서 처음 만난 천사라면, 아주 다른 생물이라면 훨씬 쉬우리라 예상했을 뿐이다. 루이라면 인간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야 했다. 그의 마지막을 견뎌 주길 바랐다.
사랑하고 있네. 에단은 미처 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 버린다. 그가 루이의 지휘관이었다면 절대 이따위로 패배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루이를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다. 사랑하는 천사는 베일을 걷듯, 천천히 날개를 접으며 키스해 온다. 드러난 고치 사이로 바깥 공기가 들어찼다. 입맞춤에는 특별할 것 없는 눈물 맛이 난다.
♣♣♣
기왕이면 웃어도 좋을 것이다. 에단이 날개 솜털을 간지럽힐 때처럼, 허리를 꺾고 상냥한 농담처럼 웃어 준다면, 깔깔대는 소리가 귓가에 닿을 적마다 어려운 일조차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다.
♣♣♣
맞아, 작은 인간. 옆을 보게, 왼편이야. 내가 한 게 아니네. 장난스러운 어조에 에단이 눈을 뜨니 멈췄던 깃털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시간이 일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는 울고 사과는 추락한다. 루이는, 어쩌면, 그만 죽은 것 같다.
♣♣♣
“에단 형님!” 그리운 목소리에 에단은 돌아보고 만다. 그곳엔 테오와 준과 그의 기사단과, 이안 왕자가 있다. 멈추시오! 이 자의 형은 일시 유예되었소! 누군가 고함을 쳤다. 어떻게, 에단은 크게 휘청였다. 그를 잡아줄 천사가 없어서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도움 없이도 곧잘 우뚝 서 있는 인간이었다.
누군가 달려와서 그를 붙들었다. 군중이 분개하는 소란 속에 올가미가 천천히 치워지는 게 보였다.
“왕자님.” 에단은 부른다. 그가 평생토록 지킬 사람이 그 누추한 곳에 서 있다.
늦어서 미안해. 적어도 우리는 같이 살아야지. 이젠 우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뒤의 일은 다 같이 책임지는 거야. 에단은 금세 사람들 가운데 와락 끼었다. 누군가 수갑을 풀었다. 모두가 두서 없이 떠든다.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이며, 이곳까지 당도한 긴 얘기를. 다들 흥분하고 있었다. 에단을 다시 보았기 때문에 행복해하고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멈추는 일 없이 제 속도로 흘렀다.
그런 식으로 그는 죽지 않고 사는 모양이다. 이상했다. 사형에서 도망치면 어떻게 사는가 싶었는데, 막상 닥쳐 오니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묵직한 수갑이 떨어지고 에단은 보랏빛 도는 손목을 감쌌다. 말하자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유가 닥쳐 오는 셈이다.
정오의 햇살이 쏟아졌다. 목숨의 유예는 끝났다. 루이가 그를 안고 불러 주던 자장가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어지러웠다. 어떤 음악에도 속하지 않던, 멜로디가…….
아래는 후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아과입니다. 이렇게 긴 글을 완결내 본 일이 처음이라 뿌듯한 마음에 후기를 적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숙련도와 상관없이 그저 오래 해왔기 때문에) 메시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더 익숙합니다. 즐겁기는 하지만 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큰 서투름이 느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천사의 딜레마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올곧고 선한 인간(으로 알려진) 에단의 소원을 들어 줄수록 천사 루이가 의심과 혼란에 빠지고 마는 상황이 보고 싶었네요. 그래서 핵심은 결말부보다 4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다 보니 루이를 대천사로 묘사한 것치고는 별 하는 일이 없습니다만…(지니도 이것보다 많은 일을 한듯), 강한 권능이 모든 것을 대충 선으로 이끈다면 재미가 덜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하고 싶다는 취향보다는 이런 방향은 피해가자는 생각이 결말을 이끌어간 것 같네요.
글 속의 가치관은 제가 생각하는 바와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결코 자기 행동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에단이 가장 선한 인간이 되는 부분 등입니다. 인간이 전혀 의심하지 않고도 옳은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신의 영역이 아닐까요…? 덧붙여, ‘옳은’ 행위와 ‘신의 뜻에 합일하는’ 행위는 서로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관이 만연한 혐오를 상기할 수 있는 점에서는 사과드립니다. ‘바빌론의 여왕’도 원문에서는 ‘창녀’ ‘음부’로 소개되는 존재인데, 임의로 변경했으나 그 속에 여성혐오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고 인정합니다. ㄱㄷ교가 가진 본질적 문제이므로 사실 소재를 차용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만….
제가 나름대로 좋아하는 부분은 (본래 가장 보고 싶었던 부분이어야 했으나) 3편의 “아무튼 그들은 한동안 좋았다.” 입니다. 얼렁뚱땅 생략해 버렸지만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거미 성운에 대해서는 https://wouldyoulike.org/featured/%EB%8F%85%EA%B1%B0%EB%AF%B8-%EC%84%B1%EC%9A%B4-the-tarantula-nebula-2/ 이 글을 참고했습니다. 첨부된 이미지가 아름다와요.
긴 글을 시간 내어 읽어 주신 것, 게다가 이 후기까지 열어 주신 것만으로도 제 쪽에서 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재미있는 부분이 있으셨나요? AU의 특성상 캐릭터 붕괴가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하고, 실망스러우신 부분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감상을 트위터 @a9ua13 의 멘션이나 디엠, 혹은 질문 상자 (https://peing.net/ko/a9ua13) 로 남겨 주세요. 짧더라도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천사의 딜레마에 대해 언급해 주셔도 좋아요. 관심은 힘이 됩니다.
모두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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