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R 스토리 <영원한 왕자님>의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있지만 날조가 훨씬 많습니다.

 


어느 공간에나 버려진 구석이 있다. 모든 쌓아올린 것들은 천천히 삭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구석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삭아가고 해체되고 부서진다. 레인은 이 중에 하나를 알았다. 이전에 이 성의 화장장으로 쓰던 곳인데 이제는 파란 꽃이 만발해 있다. 잎이 넓적하게 다섯 갈래로 갈라진, 별처럼 생긴 꽃이다. 이것들은 석회를 부드럽게 뚫고 솟아오르며 커다란 덤불을 만들어, 추워질 적에는 새카맣고 동그란 덩어리 같은 열매를 남겼다. 이것들은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마치 정원처럼 피어 있었다. 꽃이 너무 자잘하고 제각각이라 세련된 정원사가 다듬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레인은 풀밭 위로 끊어진 성벽 위에 앉아 이 꽃무리를 자주 보았다. 그 아래에 흩어진 신원을 알 수 없는 흰 뼈들이 조금씩 조금씩 삭아 가며, 탐욕스럽고 자그마한 꽃에게 먹히는 일을 상상한다.

좋은 경치를 알고 있군 그래. 레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작은 머리가 빼꼼이 언덕 아래서 솟아 있다. 아름다운 왕자. 나라의 기쁨이 되는 존재. 그래보았자 고작 열여섯 살의, 어디로 샐 지 모르는 꼬마다. 수 층 계단과 언덕을 올라온 일도 힘들었는지 잔뜩 헉헉대며 발개져 있다. 오늘은 어땠지? 레인은 손쉽게 왕자의 그 날 일정이 역사학 강의임을 기억해 냈다. 학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화국 출신의 그 교수는 박식하고 다능하되 유난히 왕자의 ‘모험심’에 약했다. 아무 핑계라도 허가해 주는 게 국가의 일이라면 이 나라는 오래 전에 저 바깥의 야만족이나 다름없이 전락했을 것이다. 레인은 내키지 않게 한 팔을 들었다. 루이 왕자님. 해가 집니다. 나오는 말은 시덥잖다. 루이는 손을 길게 뻗어 레인의 손목을 잡아 왔다. 말랑한 무게가 금세 레인이 있는 높이까지 성큼 올라왔다. 알아. 그대를 찾으러 왔어.

왜입니까? 레인은 왕자의 남빛 옷자락에서 흙먼지를 털어내고 정중한 거리로 물러났다. 왕궁에서 호출이 있다면 왕자보다는 시종이 적절하다. 루이는 커다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응? 별 이유는 없네. 그러고는 레인에게 이만 흥미를 잃은 듯 하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성 안의 모두가 그렇듯이 레인에게도 직책이 있지만 왕자의 보모 노릇은 확실히 아니었다. 덕분에 붙들어 두던 상념조차 가닥가닥 흩어지고 있었다. 이유가 없다면 굳이 왜 저와 같이 있으려는 것인가? 최소한 아침마다 머리를 빗기는 시종조차 레인보다야 좋은 말상대이다.

그가 루이를 사랑하지 않는 탓이다. 십 년만에 보게 된 자식. 나라를 이끌 왕자. 그게 어떻단 말인가? 이는 소인들이 하는 천박한 질시와는 다르다. 레인은 어떤 자격에 대해 생각한다.

마부의 발 밑에 으깨지던 머리를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는 속삭였다. 토하지 말아. 내일도 입어야 하는데 옷을 버리잖니.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반항하던 노비였다. 죽음이란 몹시 지저분하고 이따금 멍청하도록 쉽게 일어난다. 누구도 반대하거나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울었다면 오히려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자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기어다니고 있다면 그렇다. 기어다니지 않으려면 구멍을 찾아야 했다. 무엇이든 기억해 버리는 버릇으로는 이것을 찾기 쉽다.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면 그만이다. 모두가 어느덧 비참하도록 말라빠진 아이를 잊고 갑자기 나타난 걸출한 청년을 인식할 때까지.

그리고 레인은 이제 여기 와인과 버터, 꿀이 넘쳐흐르는 왕성에 섰다. 서 보니 확실히 알았다. 모든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저 동쪽 벼랑에 떠오르는 해부터, 압도하는 평원의 분홍빛 석양까지 매일같이가 뻔했다. 애초에 무언가 대단한 일을 기대하지 않은 것 같다. 인정은 충분했다. 레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본 국왕은 일찌감치 보좌관 후보에 점찍어 놓았고, 코끼리 도난 사태를 해결한 뒤로 왕성 사람 대부분도 경의를 담아 레인을 우호적으로 대했다.

다만 모든 게 속이 빈 껍데기일 뿐이다. 덜떨어진 인간들이 자기가 해 놓지 않은 공을 가로채고자 하는 심보다. 누군가가 나라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려면 그를 진정으로 멍청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모든 문제가 아주 일어나지 않도록 없애 버려야 했다. 레인은 이 평화를 만드는 일이 슬슬 귀찮았다. 기껏해야 루이 왕자에게 바쳐질 평화다. 레인은 누군가의 머리를 으깨고 싶다. 어깻죽지부터 살을 조금씩 조금씩 저며 보고도 싶다. 그 성에는 아버지도 한때 무리를 이루었던 그의 민족도 없다. 이제 레인이 뱃가죽을 단숨에 뚫고 사람의 창자를 꺼내 보이면 대체로 비명을 지를 테다. 그러고는 침묵할 것이다. 평화로운 백성만이 침묵하는 게 아니다. 두려운 백성들이야말로 진심으로 침묵할 줄 안다. 그런 식으로 레인은 친애하는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다. 변덕스럽고 잔인한 태양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새길 수 있다.

발끝에 절벽 끄트머리가 닿았다. 레인은 아래쪽의, 울퉁불퉁한 바위를 내려다본다. 노을을 받아 바위 끄트머리가 선홍빛으로 빛나고 있다. 옷자락이 가볍게 당겨졌다. 너무 숙이면 떨어져. 루이의 앞머리가 눈 위쪽을 가리며 흔들리고 있다. 이번 미용사가 형편없군. 밖으로 쫓아내야겠어. 레인은 고개를 돌린다. 떨어지면 아름다운 경치를 망칠 테니까요. 

왕자가 까르르 웃으며 절벽 쪽을 내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대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정말로 레인은 그 화장장에 시체 하나를 더 추가하더라도 아무 유감이 없었다. 루이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

 

 

 

연회를 위한 경비 상태를 점검하고 레인은 왕자의 옷감을 확인하기 위해 침실에 들러야 했다. 본래 시종장이 할 일이었으나 나태하기 짝이 없는 이들은 자기 일을 시간에 맞춰 하는 법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혐오하는 데 쓰다 보니 이제 대화하기에도 이골이 났다. 손수건으로 목을 닦으며 레인은 묵직한 침실 문을 밀었다.

수정으로 된 알이 가장 먼저 보였다. 필요 없을 거라 했는데도 루이는 굳이 고집을 부려 먼 시장에서 사 왔다. 거기 있던 소녀를 안쓰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레인이 이를 잘 닦아 건넬 때 깨끗한 흰 장갑이 스쳤었다. 조금 돌아 보니 둥근 창가 쪽에 아침에 도착했다던 적색 망토가 보였다. 다가가려는 찰나에 레인은 침대에 왕자가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았다. 그 날은 왕자에게 별다른 지시가 없었던 터라 아마 몸단장이나 마사지에 여념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침대에 눕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밤이야 어련히 기다리면 올 텐데(그러나 밤이 오기 전에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고 싶지 않대도 알았다.) 레인은 왕자를 건너다본다.

왕자에게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늘었다. 말인즉슨 용도가 좀더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예언을 의식해서인지 확실한 혼담이 오간 적은 없으나 왕자가 아니더라도 루이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질 이는 많았겠다. 그게 레인이 생각하는 자격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얇은 금색 머리칼이 적색 비단 위에 흩어져, 하나의 공들여 만든, 속이 빈 조각이 이불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런 조각이 있다면 아마 무척 부드러운 겉면을 가지고 있을 테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연약하게 내려앉는 그런 조직을. 아마도 옷감보다는 좀더 팽팽하고 대리석보다 따듯하며 언제나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는, 굳지 않는 반죽과도 비슷할 것이다. 레인은 이 새로운 조각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고 이만 헛기침을 낸다. 주무시는지요.

루이는 금방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어수선한 품하며 시동을 대하는 태도나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태양 앞에선 대주교조차 비슷한 처지일 테다. 레인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레인, 가까이 와 보게.

외람되오나..., 왕자님의 침대에 말씀입니까. 레인은 딱딱하게 답했다. 루이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이 몸의 추종자 가운데 아무나 성은을 입는 것은 아니지. 레인은 그가 성은의 성 자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성은에 감사하오나 누군가를 침실에 초대할 때에는 왕자님의 평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비천한 자에겐 할 일이 있어 가야겠군요. (레인은 적통 왕족에게 이렇게 말하고도 매질을 당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었으나, 만일 다른 신하가 그 혓바닥을 놀렸다면 곧장 아랫턱을 잘라 사자 먹이로 던지는 상상을 했을 테다.)

그대가 먼저 내 침실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루이는 김 빠진 목소리로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해치지 않을 테니 빨리 와 보게. 명령이야. 맨손이 허공을 향해 들린다.

그리고 아마도 레인은 상황의 부당함을 반박하기 위해 그 이불 위에 올라간 것 같다. 왕자에게만 뿌리는 장미수 향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가득 스미듯 차올랐다. 루이는 만족스럽게 넓은 침대의 반대편으로 꾸물꾸물 물러났다. 누우라는 뜻인 듯했다. 레인은 앉은 채로 균형을 잡으려다 마뜩찮게 자켓을 벗어 바닥에 내려 두었다.

미적거리다 연회 일정에 지장이 가면 곤란하다. 몸이 상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니 루이는 고개를 젓고 레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전에 그를 붙들고 시체 꽃이 보이는 절벽에 올라서듯이. 그 후에도 레인이 혼자 꽃을 볼 때마다 왕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쫓아오곤 했다. 레인은 그곳이 화장장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프긴 그대가 아픈 게 아닌가.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는데 어찌 계속 일하고 있는지, 보는 이 몸이 불편하군.

과연 왕자의 손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레인은 무언가를 깨닫는 것처럼 느리게 대답한다. 갑자기 어지러운 일은 비로소 병을 의식한 탓인지 아니면 몸을 급히 움직여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시야만 흔들리고, 레인은 다시 한 번 식은땀을 닦아야 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대가 몇 살이었지? 루이는 말을 돌렸다. 왕자님보다 아홉 해 이르게 태어났습니다. 잡힌 손목은 곧 뜨겁고 미끈미끈해졌지만 루이는 고집스레 쥐고 있었다. 그 부분에부터가 천천히 욱신거리기 시작해 레인은 천천히 온 몸이 차갑게 가려운 듯이 느껴졌다. 놓기 위해 그의 연약한 목을 조르는 일은 쉽겠지만 레인은 차라리 그 자리에 엎어지고 싶기도 했다. 루이는 레인의 손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 몸을 건강히 하게. 이 몸을 오래 보좌하기 위해서 말이야. 여기에는 잠깐 누워 있어도 좋아. 누군가 말하기로 그대는 잠도 앉아서 잔다던데.

그렇지만 저는. 레인은 대답 대신에 커다란 창을 바라본다. 흰 창에는 다닥다닥 붙은 성촌이 내려다 보인다.

 

혹시 어딘가 갈 생각인가? 루이의 말이 빈 방을 울렸다. 중앙에서 동떨어진 침실 복도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레인은 여전한 권태감을 느낀다.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 그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어떤 즐거움이나 흥미 따위는 없다. 살아가는 일이라면 짧지만 지겹도록 했는데, 균열을 알아챈 후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균열이란 어떤 일도 슬프거나 기쁘지 않다는 사실이다. 창 밖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정작 레인이 책임지고 싶은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레인은 죽음을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레인은 왕자와 마주보도록 어깨를 눕혔다. 루이는 눈썹을 으쓱한다. 동그랗고 어린 얼굴이다. 나도 모르네.

그렇지만 정할 수 있다면 내 옆을 정하게나. 그대가 사랑하는 왕자가 아닌가? 왕자는 말을 마치고 레인의 뺨에 키스를 내린다. 잠들기 전에 어린아이에게 내리는 입맞춤이다. 시녀들이 종종 아이들에게 하는 꼴을 본 적이 있다. 열여섯 살치고는 퍽 능숙했다. 레인은 눈을 깜빡이며 마주 누운 루이를 바라본다. 사랑할 줄 안다는 건 이런 일인가? 누군가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열로 젖은 머리카락이 넘겨진다. 레인은 정말 루이의 백성이 된 것마냥 가만히 왕자의 침대에 누워, 짧고 불경한 시간을 보내었다.

 

누군가는 불행한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레인은 이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에 골똘히 생각한다. 그러나 내 삶은 네 옆에 있기로 정할 수가 없어. 레인의 왕국에 좋은 향기와 사랑 따위가 있기 어렵다. 어쩌면 루이는,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커튼이 새장 창살처럼 침실 위에 매달렸다. 이 천이 루이의 얼굴에 얇고 섬세한 레이스 그림자를 드리웠다. 레인은 손으로 이를 걷어내 부드럽게 틈입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응시하는 곳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왕자께서는 화려한 그의 궁전을 벗어나 어디에 가 계신 것인가, 레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다고 하면 필시 온 국민이 불안하고 슬퍼할 테다. 소중한, 그들을 사랑하는 왕자님이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작은 머리들을 부지런히 굴려볼 것이다. 실제로 루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누구도 모른다. 그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을 하는데도 그렇다.

그 빈 시선에 레인은 안도한다. 졸리십니까. 루이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숨결이 있다. 아아니, 서쪽 산에 일어났다는 산사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네. 백성들에게 식량을 지원해야겠으나 강도 구역이 낀 탓에 교통 사정이 좋지 못해. 용병을 고용하고 재건을 위한 자재를 보내는 편이 좋겠지.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레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서쪽 산이라면 너머에 황무지뿐입니다. 국경 지대에 작은 감시탑이 있으나 제대로 관리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방향으로는 수십 년간 침입이 없었지요.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근처의 큰 도시로 모두 이주시키는 편이 당장의 자원 낭비를 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과 터전은 어쩔 텐가. 

우선은 무너진 채로 두지요. 빗소리가 방 안에 느리게 울리기 시작했다. 루이의 한쪽 얼굴이 푸른 저녁의 빛을 따라 창백하게 물든다. 언젠가 다음 세대가 온다면 재건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장엄한 소음은 안전한 온기를 뚫지 못하고, 북 두드리는 먹먹한 비명을 낸다. 

다만 지금은 살아갈 수 있겠습니다. 공격적인 물줄기가 모든 것을 쓸어 가는 가운데 밖은 천천히 젖어 가고, 레인은 이 안전한 성, 부드러운 커튼 너머에 앉아 있다. 그는 왕자의 초록 눈이 서서히 심원한 빛을 띄는 모양을 본다. 잠깐 뿐이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색채. 영원한 끝이 예견된 생. 그럼에도 왕자는 전혀 모르는 이들이 다만 그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려 든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생각이나 고민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텐데도 그렇다.

 

나는 왕자에게 이해받고 싶은 것인가? 그는 종종 생각한다. 루이가 힘 없고 천한 인간들을 보듯이 레인을 본다면 그는 훌륭한 주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인은 루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다가오는 인간들이 어떤 지저분하고 음침한 목적을 가지는지도 미처 구분하지 못하는 이다. 그가 사람의 생각을 이해했다면 레인은 진작에 죽었을 테다. 루이를 이루는 것들은 사람의 머리를 으깨는 것들이 아니라 대체로 속을 아프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쿠탄 족이 마지막 답을 보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침입을 가장 먼저 경고했던 이가 자신이었다. 레인이 멈추기에도 이제 늦었다. 후회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왕족도 아니었다. 루이, 어린 그의 친구만큼은, 고통이 없도록 맨 처음에 목을 비틀어 줄 수 있는 정도의 예외이다. 레인은 다른 사람들만큼 그를 혐오하는지 도통 종잡을 수 없다.

 

 

 

✻✻✻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레인은 죽어가는 왕자를 내려다본다. 그처럼 흐린 초점으로는 그가 신하의 표정을 하는지 반역자의 얼굴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살리기 위해 그는 이러고 있는가? 레인은 문득 한심함을 참을 수가 없다. 받은 종이는 벌써 반쯤 구겨졌다. 보지 않아도 항복이나 구조요청이 아닐 것은 뻔하다. 무슨 대단한 계약조차 아니었다. 이 약속이 어떤 쇼를 보장한다면 그것은 기적적인 수호보다는 비참한 죽음에 가깝다.

지독하고 더러운 공기가 폐부까지 밀려들었다. 레인은 일어나지 못하는 루이 앞에 앉았다. 살아날 것을 대비해 독약도 들고 온 참이었다. 지금이라면 레인은 이 고통 속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는 천사가 될 수 있다.

 

이만 하시지요. 말은 의지와 상관없이 나왔다. 그는 스스로 당황해 머뭇거렸다. 포기한다면 살 수 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할 뿐이지요. 그것만이 예언이라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루이가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졸음에 잠기듯 꾸벅꾸벅 눈을 감았다 뜨더니 나는 왕관의 무게에 책임을 지기로 했네, 그랬다.

왕자여. 그 왕관은 어디 있습니까? 레인은 루이의 깡마른 몸을 붙들고 입맞춘다. 다만 살 수 있는 방법만큼은 기어코 거절하면서. 그 대단한 백성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 이제 레인은 하나를 불러 내어 재미로 뺨을 칠 수도 있었다. 그건 상상만큼 재미있기보다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시체에 핀 꽃 대신 레인은 이 장미를 오래오래 봤다. 레인이 살기 바라던 인간. 그러므로 죽이고 싶은 마음조차 이해하길 바랐다. 레인은 그런 인간이다. 그는 루이의 턱을 붙들고 엷은 입천장이며 혓바닥을 놀리듯 훑어 내고, 그의 숨을 들이켜고 싶은 것처럼 꽉 붙들었다. 그래, 차라리 레인을 위해 산다면 좀더 짜릿할 테다. 모든 것을 포기해 준다면. 질척대는 소리가 좁은 감옥에 퍼졌다. 어디고 온통 쓴맛이 가득했다. 루이는 낮게 앓는 소리를 냈으나 그를 밀어내지도 않고 고분고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할 힘도 없을지 모른다. 죽어 가는 쓴맛은 조바심을 내 레인은 가느다란 목 근처를 작게 깨물었다. 왕자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급히 숨소리를 냈다. 떨며 마른 울음을 삼키는 소리였다.

그러나 열병이 난 날 왕자의 침대에 누워 있던 일만큼 불경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곁에 있으라던 자비로운 목소리만큼 터져 오르는 감각을 가져다 주지도 않았다. 레인은 생각한다. 끔찍한 일이군. 이토록 그의 왕국을 망쳐 놓고 심지어 초췌한 꼴로 죽이더라도, 아마도 왕자가 사랑하는 백성 중 레인만큼은 왕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잊기에 레인은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았다. 그는 깨끗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더 늦어지는 일은 수상했다. 레인은 어두운 눈으로 인형처럼 삐걱대는 루이를 똑바로 앉히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말한다. 연회에서 뵙겠습니다.

 

 


비행기에서 썼다. 레인을 살리는 루이가 보고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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