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천사 루이와 인간 에단AU

이 글은 픽션이며 실재하는 종교와 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천사의 딜레마 1[링크]

천사의 딜레마 2[링크]

천사의 딜레마 3[링크]


 

 

에단은 나무 옆에 서 있다. 나무는 조랑말 정도의 크기로 작은 그늘을 허리께에 드리운다. 작고 둥글고 여린 잎이 바람이 불 적마다 흔들렸다. 눈을 드니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노란 빛이다.

발 밑을 보니 시체가 있었다. 기사는 힘없이 처진 죽은 이의 시퍼런 혀를 내려다 보고는, 그를 밟고 올라서 본다. 물렁한 살덩이가 신발 아래에서 짓눌렸다. 어차피 죽은 살이다.

“이보게 인간.” 루이가 위에서 그를 불렀다. 장난스러운 어조다. 에단은 고개를 돌려 천사를 바라본다. 햇볕의 사랑을 듬뿍 받은 레몬 빛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찰랑이고 있다. 얼핏 속이러 온 자로도 착각할 법한 아름다운 얼굴. 퍽 어울리는 희고 넉넉한 옷. 맑은 눈동자가 에단을 담고 있었다. 어떤 후광이라 일컬을 만한 광원은 조금도 없었으나 에단은 빛을 느낀다. 열기, 따스한, 엷은 잎맥 뒤로 비치고 뺨의 솜털조차 흔들리게 하는, 빛이.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서 비추던 것을 머리가 기억하는지도 몰랐다. 그 음침한 공간이 한 번도 바라본 적 없던 빛일 테다. 루이, 기사는 답해 본다.

천사는 대답을 않고 그만 웃어도 에단은 자꾸 부르고 싶어진다. 루이. 그의 이름에는 무언가 있다. 돌아본다면 몇 번이고. (그리고 루이는 꼭 돌아볼 테다.) 루이. 루이. 나의 천사……….

 

 

 

 

 

눈을 뜨니 정말 그가 있었다. “아, 이제 일어났군.” 루이는 한 손에 등불을 들고 에단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안녕, 귀염둥이. 새벽에 깨워서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신께서 늘 깨어 있으라 하지 않았던가? 시기 부적절한 농담도 천사가 하면 괜찮은 모양이었다. 에단은 느리게 앓는 소리를 내 본다. 정말 사방이 캄캄했다. 눈을 다시 감으면 곧바로 빽빽한 잎이 달린 나무와 가없는 벌판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감고 있기만 하면…. 루이가 에단을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한다. 잠투정도 귀엽지만, 진짜로, 일어나게. 이러다 늦고 말아.

“어디에.” 에단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진다.

“당연히, 외출일세!” 루이의 산뜻한 목소리는 정말로 에단이 이미 약속된 일정에 늦은 것처럼 귀를 울렸다. 물론, 정작은 조금도 들어보지 못한 외출 얘기다. 잠에서 덜 깬 에단은 잠깐 동안 외출복이 있던가, 생각한다. 그리고, 루이에게도 타고 다닐 마차가 필요하겠지. 마차…. 점차 정신이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지듯 또렷해졌다. 여기는 안전 가옥이다. 외출이라니.

“왜 난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지.”

“그대가 반대할 것 같아 말 않았도다. 현명하지. 느하핫!”

망할 천사. 사람을 세 시간 재워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게. 에단은 루이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는 쉽게 누워 있는 에단 위로 무너져 준다. 얼른 팔꿈치를 세워 슬금슬금 고개를 들이민 루이가 눈을 빛냈다. 걱정 말아. 들키지 않고 금방 돌아올 걸세. 하루 내로.

“그냥 도로 잘 순 없나.”

“안 되네.” 루이는 에단의 허리를 꾹 찔러 왔다. 가능하다면 정말로 던져 버리고 싶다. 수호천사 맞는 건가? 천사다운… 어떤 정중함이나 신비라곤 조금도 없는 게, 어쩌면 날개 달린 종족 중에서도 견습에 가까운지 모른다. 벌써 몇 번이나 한 생각이었다. 루이가 스스로 대천사라 한 적은 있으나 에단의 머릿속에선 희미하게 느껴졌다. 분명한 것은, 사후 수호천사 평가가 있다면 만 점은 주지 않을 생각이다. 루이는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듯 에단 위에서 다리를 휘적인다.

“나갈 생각 없다.”

“그렇다면, 뜻을 이루지 못해 불행하게 됐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게 수호천사의 목적 아니었나. 네놈은 자격 미달이다.”

“아아…. 약간의 희생은 필요한 법이지.” 헛소리다. 온통 헛소리 뿐인 대화에 에단은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었다. 대신에 그는 하품을 참아야 했다. 루이는 거의 있는지도 모를 깃털 같은 무게로 눌러 왔으나 머리가 무거웠다. 천사는 히죽대며 그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춘다. 등불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두고, 서서히 내려오는 얼굴에 에단도 숨을 멈춰야 했다.

 

뺨에 닿을 듯 말 듯 입 맞춘 뒤에 루이는 다시 몸을 세웠다. “일어나면, 한 번 더 해 주지.” 그러고 시선을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에단은 불만스레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네 입맞춤이 그런 가치까지 지녔는지 모르겠군.” 루이가 발끈할 차례였다. (가끔 그는 거의 쓰여진 책처럼 반응하는데 그게 우스웠다.)

“천사의 키스를 위해 인간들이 어떤 것을 바치는지 아는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에단은 깬 채로 더 누워 있을 용의도 없었다. 게으른 자나 그럴 테다. 에단은 루이를 적당한 힘으로 밀어 내고 몸을 돌려 일어났다. 손끝이 차가웠다. 풀벌레 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다락이나 지붕에 앉은 모양이다. 밀쳐져 데굴데굴 구른 루이는 금방 공중에 떠서 흐뭇해 보이는 눈길을 보낸다. 오, 에단…….

“조용히 해라.” 에단은 빠르게 말을 끊었다. 그럼에도 루이는 기어이 에단의 얼굴을 붙들고 상을 내리듯 다른 뺨에 키스하고 만다.

 

 

 

 

 

루이는 늘 희고 깨끗한 맨발을 하고 있다. 아마 그가 땅을 밟을 일이 없어서일 테다. 이 땅은 인간을 증오하듯이 날을 세워 그들의 약한 발바닥을 찢고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게 자연의 본성이다. 아마도 옛 인간, 좀 더 수준 낮고 땅을 기어가던 이들은 두텁고 거친 발바닥을 가져 악의 가진 땅을 자근자근 밟고 다녔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지능적으로 바닥을 만들어, 집어삼키는 자연의 손아귀로부터 연약한 맨살을 지켰다. 천사는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섬세한 발등이며 작은 발가락을 내놓고 다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는 땅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에단은 그 발등을 볼 때마다 다소간 신을 생각한다. 그를 처음 본 날에 에단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태 생각은 멈춘 적이 없다. 무서워하지 말아. 빛나는 생물이 말했다. 그는 모셔진 왕관에 박힌 보석 같은 눈을 했다. 에단은 그가 바빌론의 여왕이리라 생각했다. 흰 날개를 가졌으니 분명 사도를 가장한 어떤 것이겠다. 그런 잠언을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다. 마치 구원처럼 다가와 발목을 끊어 버리는 자들. 그리고 그는 노래하며 철창을 열어 준다.

하지만 우습다. 에단은… 이안을 보내던 순간을 생각한다. 그를 다시 만나, 그 때는 주군에게 평생을 바치리라 굳게 맹세했다. 그는 살기 위해 정말로 땅을 기었다. 집어삼키는 땅이 에단의 손이며 뺨을 따갑게 공격한다. 피가 너무 쏟아져 시야가 차갑고 희게 질렸다. 자신이 죽인 시체의 눈이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은 죽은 자의 비열한 얼굴을 떠올린다. 힘 없는 자가 힘 없는 자를 도와야지요, 그런 말을 지껄였었다. 이안의 왕위 계승을 저지한 공을 얻으려 했겠지만, 죽은 뒤에 그는 일족에게 더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듯하다.

 

그가 죽인 자는 적이지만 그 일족은 아니다. 이들은 전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관련이 없음을 요란스레 피력하려는 것인지, 에단에게 혐의를 두고 이안 또한 살인 및 반역 사건의 피해자라고 간주했다. 힘 없는 타국 왕자에게 존중과 유감을 표하며 그들의 날개를 제공한 것이다. 에단의 기소자들로서는 하찮은 집안의 나부랭이라도 죽은 김에, 왕위 후계자를 보호해 이웃 국가에 균열을 일으키는 쪽이 이득일지 모른다.

본래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희미한 존재, 그대로 죽었으면 약한 왕자의 비극적인 죽음과 기사의 자결로 끝을 맺었을 터다…. 에단이 반역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안 측에 살해 책임이 돌아오는데, 이를 막아줄 방패는 없다. 어떤 세력의 보호를 받을 때 왕자는 그나마 목숨을 연장할 수 있다.

 

품위와 진실을 지키고 주군과 함께 침몰할 것인가? 아니면 교수대에 설 것인가? 이런 질문에는 답을 내릴 필요가 없다. 이런 질문들은 그저 무언가를 느끼게 할 뿐이다.

 

 

감옥 벽에는 표정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얼룩이 있다. 에단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어떻게든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돌을 긁어 댄 자국들이 가득했다. 어떤 이름자들, 의미가 사라진 숫자, 꼭 별자리처럼 보이는 그림이. 에단은 까마득한 산이 보이는 곳까지 말을 타고 달리던 일을 떠올린다. 그토록 멀리 갈 생각은 아니었다. 단단한 말 등 위에서 그는 안정적으로 흔들렸다. 어느 순간에 그는 지상에 홀로 남겨졌다. 거친 숨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만이 남았다.

까마득한 산 맨 꼭대기에 올라간 예언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맨 몸으로 산에 올라 신과 독대한 뒤에 내려왔다고 한다. 에단은 어떤 인간도 보이지 않는 고독한 산을 바라본다. 세찬 바람이 에단의 머리를 정처없이 휘날렸다. 그는 신과 간절히 만날 필요가 없다. 팽팽한 자유함 속에 에단은 생각한다. 신은 항상 그의 의지와 함께 할 것이다.

 

 

 

 

자칭-천사는, 바라는 게 없다는 말에 적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단이 지극히 감동하며 일생의 소원이라도 꺼내들 줄 알았다는 태도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놀랄 필요가 있던가? 에단은 황당해졌다. 내가 그를 미리 알기라도 했던가? 혹시 남의 소원을 이루어 주어야만 해방될 수 있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의 주인공인가?

그들은 몇 번이고 의미 없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제 상대는 답답해진 모양이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모조리 질 얼굴이다. 그 ‘천사’는 계속해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묻는다. 농담 같은 상황임에도 에단에게 그를 놀리거나 할 심산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을 끌어도 건질 것이 없으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단은 마지막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침대(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납작한 돌) 위에 앉아 본다.

 

가난한, 상황의 가난한, …인간. 그러나 에단은 어떤 비참이나 절망을 맛보고 싶지 않다. 이는 패배자들이 오래 슬퍼하기 위해 곱씹는 감정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 나약함조차 사랑하는 나머지 계속해서 꺼내어 보고는 슬퍼하기를 즐긴다. 바라는 것이야 얼마든 댈 수 있겠다. 주군의 강녕, 기사단 모두가 건강할 것, 결코 몰리지 않을 것, 반드시 승리할 것, 더 많은 세력… 천사가 그 곳에 있다. 빛나는 금발을 하고 팔을 뻗는다.

하지만 에단은 자신을 그곳에서 꺼내 달라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소원도 모두 포기하고 만다. 그대는 이 곳에 어울리지 않아, 천사는 말하지만, 그가 무엇을 알겠는가? 에단이 지금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자칭-천사야말로 이만 가야 할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들이 어떤 흔적이든 남기고 싶어하는 이 소굴에서. 그들이 천사를 본다면 미처 어떤 권능을 보이기도 전에 온 몸을 찢길 테다.

 

그렇지만 천사는 어디 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에단의 옆에 내내 있겠다는 것이다. 그의 옷자락은 바람도 불지 않는데 느리게 펄럭인다. 에단에게 찾아온 어떤 구혼자나 암살자도 이토록 끈질기지 않았는데, 상대는 하필 이생물이다. 에단은 루이의 얼굴을 본다.

몇 번을 봐도 인간을 속이기 위한 외형이었다. 그렇지만 이만 꺼지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불행하게, 그리고 기묘하게도, 기사는 그가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 든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본디 에단은 보여지는 데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옳은 일을 찾아 왔다. 하지만 여기 감옥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모두가 고개를 돌린 것과 같다. 교수형만이 기다리는 곳. 인식되지 않고 유효하지 않은. 존재 바깥에 에단은 서 있다.

 

이 자칭-천사는 에단을 보고 있다. 그게 인간에게 미묘한 꿈틀거림을 준다. 이 생물에게 좋을 일을 하고 싶거나 잘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루이란 생물은 말하자면 어떤 증거 같다. 에단이 거기 존재하며 선택이 의미를 가진다는 증거. ‘이젠 어떻게 되어도 좋다’ 따위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게끔. 마치 저 바깥에 자유롭게 서 있을 때와 같다.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매 순간 살아 있다고 확신하던 때와. 존재 바깥에 선 적이 없던 시절(불과 몇 달도 되지 않은 것 같다)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한 감각이다.

그래서 에단은 잠깐이나마 이를 연장하기로 한다. 루이가 천사이건 강도이건 그다지 관계 없었다. 거기 있기만 하면은.

 

 

 

 

 

 

바깥 병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루이는 장난스레 눈을 빛내고 에단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에단은 마지막으로 칼을 제대로 찼는지 확인하고, 그에게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했다. 문을 나서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집 바깥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 깔려 있다. 그다지 평범한 시골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이다. 처음 출입할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으므로 며칠, 몇 주를 지내도 미처 낯선 곳이었다. 새벽 공기가 폐를 부풀렸다 차게 빠져나갔다. 그것은 적어도 익숙한 물 냄새를 담고 있다.

“돌아가는 거겠지.”

물론이네. 그대와 사랑의 랑데부를 할 작정이었다면 좀더 멋진 시간대를 골랐겠지. “닥쳐.” 에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루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섰다. 과연 랑데부보다는 죄수의 도망에 좋은 시간이다. 달빛은 구름 가운데 침잠하고 어느 곳도 아름답기보다는 특히 음산했다. 앞서가는 루이만이 약한 빛을 내고 있다.

“어딜 가는지 묻지 않는가?” 루이가 문득 물었다.

네가 알겠지. 에단은 대꾸한다. 이 ‘외출’에 그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던 바다. 루이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멈추지 않고 날았다. 달빛도 없는 길을 에단은 헤매이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수십 분 뒤에야 광원이 등장했다. 비교적 마을 외곽으로 뚝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루이는 그의 인간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걱정하듯 자주 뒤돌아 보았고, 에단은 그럴 때마다 말 않는 동물을 이유 없이 좇는 태만한 인간이 된 기분을 느꼈다.

소란한 기운을 느끼고 에단은 얼굴을 찌푸린다. 어떤 기념일이나 대단한 행사가 있더라도 이 시간은 어련히 철수하고 잠에 빠져들 때인데, 아침까지 유흥을 즐기는 인간들이란 도통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이 깨어 하는 일이란 잠을 쫓을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고, 먹고 즐기고 토하고 다시 먹고 소리지르는, 에단이 볼 때 일종의 광기였다. 루이는 설마하니 이런 시간에 축제 따위를 어울리라고 데려온 건가? 그렇다면 큰 실수였다.

마을 입구에 점차 가까이 다가갈수록 익은 과일과 과자 냄새가 풍겼다. 루이는 갑자기 에단을 내려다보더니, “외관은 걱정 말게. 저들에겐 거의 보이지 않을 걸세.” 했다. 따로 성벽이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가볍게 울타리를 넘었다.

 

다 녹은 촛불들이 잔뜩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남은 음식이며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고 걸걸한 소음은 먼 데서 이따금 들리고, 엎어진 이들의 구역질 소리가 화음을 냈다. 상상 이상으로 지저분하군. 에단은 가능한 이 비틀대는 역겨운 인간들 사이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으나 루이가 그의 팔을 잡아 왔다.

“가지 않으면 안 되겠나.” 에단은 결국 말을 꺼냈다.

원한다면 내가 함께 하지. 루이는, 여태까지 같이 걸은 일이 아주 없었던 마냥 대답했다. 에단은 문득 그 말이 루이가 땅으로 내려온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천사에게서 희미하게 나던 빛은 사라지고, 흰 옷 대신에 무난한 빛깔의 베 옷과 스카프를 걸친 루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에단은 천천히 시선을 내린다. 벗은 발 대신 가죽 신이 보였다.

“맨발로 다니면 이상하지 않겠나?” 루이가 입을 떼었다. 정말 그랬다.

“무슨 생각이지?”

“럼이나 한 잔 하겠나? 저 술통에 남은 것 같군.”

안타깝게도 에단은 취할 마음이 없었다. 다 끝난 축제를 즐기고 싶지도 않았다. 귀족들의 겉멋 든 연회는 물론이거니와 평민들이 벌이는 이런 류의 행사에는 더욱 어울린 일이 없었다. 루이는 성큼성큼 난장판이 된 테이블과 광장으로 향한다.

“신년 축제라네. 새해맞이 종을 울렸지.”

그렇군. 에단은 생각을 비우고 천사의 뒤를 따랐다. 그는 흔들림 없이 곧게, 기둥에 고꾸라진 누군가에게 향하더니 몸을 숙였다.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는 자인가? 에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이가 말을 건 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손에 들었다. 들여다보니 류트의 일종이다.

무엇을 연주해 드릴깝쇼, 나으리? 꾀죄죄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루이는 유쾌한 얼굴로 “그대가 아는 것 중 느리고 사랑스러운 곡으로.” 하고는 에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건네는 은화가 반짝였다.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악사에게 주는 비용 치고는 과하다고, 에단은 생각한다. 류트 퉁기는 소리가 소음을 가르고 시작되었다. 처음에 음을 정하는 듯하던 악사는 금세 박자에 맞추어 느린 곡조를 연주했다. 어딘가, 눈 쌓인 적막한 땅과 타오르는 화톳불이 떠오르는 멜로디였다.

 

 

루이가 손을 잡아 왔다. 그의 손이 따끈한 연유에는 자신의 차가운 손끝이 있을지, 에단은 생각한다. “좀 걷지.” 나무에 걸린 색색의 헝겊 조각이 흔들렸다. 거리에 퍼지는 음악 소리를 뒤로 하고 그들은 마을 중심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 중앙에는 거대한, 불타오르는 나무 더미 같은 게 보였다. 불을 붙인 지 꽤 되었으나 아직까지 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루이는 눈도 돌리지 않고 에단을 다른 길로 끌었다.

 

 

 

 

그곳엔 용도가 확실치 않지만 관공서처럼 생긴 석조 건물이 있었다. 에단은 자그마한 저울 동상을 보고 그것이 재판정임을 알아냈다. 그곳이 목적지인가? 루이는 누가 보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대문으로 걸어가 한 팔을 들었다. 그 동작만으로 문은 그들 앞에 활짝 열렸다.

건물 안은 발소리가 온통 울렸다. 에단은 이 기묘한 침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재판정 내부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고 그들만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몇몇 구조물을 지나쳤다. 방청객과 구경꾼을 가르는 울타리, 판관이 앉는 곳, 죄인이 세워지는 단상……. 루이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보게.”

에단은 고개를 든다. 달리 생각하려 해도 또렷한 교수대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장난 같은 단순한 구조로도 사람의 목을 부러뜨리도록 고안된 올가미.

류트 소리가 그곳까지 엷게 들렸다. 어떻게 이 멀리까지 퍼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루이는 에단의 손바닥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왜…” 에단은 올가미에서 눈을 돌려 루이를 보았다. 그의 말은 시선을 피한 천사에 의해 뚝 잘렸다. 내일이 재판일세.

 

 

 

 

 

신년 축제도 지났으니 오래 끌던 사형 재판을 함으로 ‘사기를 고양시키려’ 한다고 들었네. 오전중에 그대를 끌어가겠지. 어째서 인간은 올가미에 흥분하는가? 이해할 수 없군. …하여간, 그대의 요청도 받아들여져 신관이 그저께 도착했어.

“하지만 교수형임은 변함없지.” 에단은 서늘하게 말했다.

루이는 에단의 손을 아프지 않을 만큼 잡아당기고는, 다소 화난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표정은 곧 울적함으로 천천히 바뀐다. 에단도 스스로 화를 내야 할 지 루이의 반응을 조소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졌다. 그도 당장 내일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그대의 수호천사로서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루이는, 낮은 목소리를 냈다. 지금 내게 말하면 영영 도망갈 수 있어. 여기서, 지금. 어둡고 텅 빈 재판정 안에 그들은 서 있었다. 다음날이면 사형이 선고될, 목이 매달릴 바로 그 장소다. 어렴풋이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죽음에 환호하는 소리가.

 

에단은 천사가 그러겠다는 대답을 듣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느낀다. 그 인외 생물의 거대한 기대감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다. 그러나 천사가 바라는 것이라니 이상하다. 보통은 땅에 있는 생물만이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는 탓이다. 천사들은 그저 명령을 하거나 따르면 된다. 인간들이 미처 알 수 없는 옳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을 분간하여 경고하기만 하면 끝이다. …그렇지 않은가?

루이의 눈은 여전히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반짝인다. 꿈에서도 본 빛이다. 에단은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닫는다. 그가 침묵하자 루이는 느리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대의 생각이 어떻던 간에, 준과 테오에게는 알렸네.”

“그래.” 그들은 되도록이면 찾아오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루이의 손을 잡고 나오는 길에 에단은 뒤를 돌아 올가미를 한 번 더 눈에 담는다. 무섭진 않을 테다. 무서운 것은…. 음악 소리는 여전히 느리고 사랑스럽게, 끊길 듯 거리에 맴돌고 루이는 이제 목적을 잃은 듯 아무렇게나 그들을 인도했다.

 

 

 

 

 

둘은 커다란 장작불 앞에 다시 섰다. 불씨는 꺼져가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타오를 게 있는지 계속해서 허공을 삼키고 있다. 불꽃이 루이의 한쪽 얼굴과 눈동자에 어른어른 비쳤다. 그들은 여전히 미끄러지는 일 없는 두 손을 잡은 채다. 에단의 손도 이제 손마디마다 심장이 뛸 것처럼 따끈했다. 천사가 거기 있다. 그는 에단이 거기 있으라고 부탁한 뒤부터 내내 있었다. 그렇게 나란히 서 있으니 정말로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이 낯선 마을에서 만난 것 같았다.

루이는 의식하지 못한 듯 손을 앞뒤로 흔들고 있다. “그대에게 언젠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네.”

“어떤 건가.”

“조금 먼 곳에 있는 성운일세. 별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지.” 에단은 밤하늘을 잠깐 바라보지만, 날은 흐렸다. 오리온보다는 다소 멀지만 거미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성운 내부의 별들이 제각기 열과 충격파를 보내 뻗친 여덟 다리와 눈알 같은 형상을 만들지. 아름다운 우주 독거미라네. 들여다보면 어린 별들이 태어나는 일을 볼 수 있어. 에단, 이따금 비어 보일지라도,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차 있는지 알면 놀랄 걸세. 심지어 먼지조차 자기 궤적을 따라 떨어지지. 루이는 에단의 팔에 바싹 붙어 왔다. 지금은 그게 떠오르는군. 그대에게 날개가 없으므로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뭐 어떤가?

에단은 우주 독거미를 상상하지만 아무래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천사는 그와 어떤 약속을 하려는 것 같았다. 무의미하지만 잃어버리지 않을 약속을. 발 아래까지 기어온 불씨를 에단은 비벼 껐다.

 

 

“밤은 남았지만 돌아갈 길을 인도해줄 수도 있네.”

“아까 뭔가 마시라고 하지 않았나.”

럼? 루이는 갸웃하더니 웃었다. 아, 농담이었네. 저 궤짝에 있는 걸 마셨다간 그대는 쓰러질 걸. 가여운 노숙자 행렬에 낄 지도 모르지. 저기 주점이 있긴 해. 좀 더… 산뜻한 걸 시도해 보는 건 어떤가? 음주를 장려하는 천사 옆에서 에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게 차라리 좋다. 평안을 가장하고.

 

주점 내부는 어둡고 노란 빛이 드문드문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의외로 상당히 조용하고, 대부분이 테이블을 잡고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긴 테이블 안쪽에 선 덩치 큰 이가 에단을 보고 “방을 잡아 드릴까?” 했다. 과연, 여관과 겸하는 곳이라 정숙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루이가 에단 옆에서 “두 명일세.” 하고 전의 은화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대체 어디서 꺼내 온 건지 알 수 없다. 없는 은을 만들어 내어도 세계의 균형이 맞는 건가?

“땅에서 솟는 모든 소산은 그분께 비롯된다고 생각하게. 그리고 내 것이지.” 루이가 속삭였다.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투다. “한 잔 하는 줄 알았는데.” 에단은 다른 말로 답했다.

올라가서 마시면 되지. 그대는 그다지… 부대끼는 걸 내켜 하지 않으니. 루이는 술 값도 치르고는 테이블에 기댔다. 틀린 말이 없으므로 에단도 그 옆에 가만히 서서 잔이 나오길 기다렸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에단은, 어떤 기분이 들어서 음주한 일이 결코 없었다. 인생이 끝나기 전날이라도 예외는 없다. 술이 인생을 그다지 즐겁게 만들지도 않을 터다.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쓸모 없는 일에 열중하게 한다. 욕망하기, 노래하기, 슬픔에 빠지기, 우주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기, 그런 것들.

 

그렇지만 루이와 바깥을 정처없이 헤매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작은 헛생각 정도는 신께서도 용서할 것이다. 방 열쇠를 받아 들고 루이가 손짓한다.

 

 

 

 

간만의 술은 미지근하고 신맛이 났다. 취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루이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히죽대며 에단을 보고 있다.

“이 몸이 진짜 왕자라면 이런 곳에 오진 않았을 텐데, 실례했군.”

에단은 음료를 단숨에 전부 마셔 버리기로 했다. 정말 먼 나라 왕자라면 어딘가 궁전 같은 곳에서 만났을 테다. 에단은 리본과 금줄이 많은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루이를 상상한다. 에단은 첫눈에 싫어했을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 주겠다는 말이나 하고…. 에단은 그가 천사든 인간이든 거절할 것이다. 그의 본분을 다 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만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왈츠를 한 곡 출 수도 있다.

 

“신년을 맞은 것을 축하하네. 작은 인간이여.” 에단은 퍼뜩 루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새해다. “바라는 게 있는가?”

에단은 대답 대신 손짓했다. 루이는 평소처럼 몸을 띄우는 대신 삐걱대는 바닥을 밟고 그에게로 다가온다. 포옹해 달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천사는 언제나 할 일을 알았다. 날개에 둘러싸이면 고치에 감긴 느낌이 된다. 온 몸이 그만 죽처럼 녹아 내리는 류의 고치다. 안기고도 말이 없자 루이는 낮은 멜로디를, 혼잣말처럼, 에단에게는 어딘지 안온한 소리로 허밍한다.

에단은 루이가 떨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춥냐는 질문을 하기에는 맞지 않았다. 장난이라도 쳐 보려는 것인가? 껴안은 등을 고쳐 잡으니 루이가 숨을 들이키는 게 느껴졌다. 기묘한 감각이 피부를 간질였다. 루이와 있으면 가끔 드는 감각이다. 거룩한 기운이 온 몸을 훑는 느낌.

올려다보니 천사의 안색은 몹시 나빠져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지거나 내장을 게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루이는 당황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에단은 그의 뒷목에 고인 식은땀을 보고 손을 들었다.

“…뭐지?”

“그대는 왜 괜찮은 건가?” 루이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천사의 몸에 손을 올리니 뜨거웠다.

“무엇이?” 에단은 천천히 그를 향해 기울어 오는 날개를 흘끔거렸다. 그런 크기라면 시야를 깜깜하게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질문도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내일 죽는 게 괜찮냐는 말인가? 그렇다면 에단은 그다지 초월한 체 굴려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종착역을 보고 온 셈이다. 그다지 찬란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은. 그렇지만 단순히, 이 싸구려 술집 겸 여관에서 루이와 껴안고 있는 편이 목숨을 구걸하는 일보다 좋았던 탓이다. 괜찮아지려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루이의 손끝이 에단의 입가를 건드렸다. 흰 손가락은 부드럽고 간지러울 정도로만 아랫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에단은 이만 눈을 감아야 할 것 같다.

 

천사는 그에게 입맞추고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떨어졌다. 녹색 눈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찼다. 에단은 루이를 꽉 붙들었다. 이해한다는 듯이 다정한 키스 한 번. 흩어지지 않도록 또 한 번. 살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귓속에 온통 울렸다.

어느 순간에 에단의 등이 푹신한 침구에 닿았다. 루이는 붉어진 뺨을 하고 그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알기 쉬운 얼굴. 에단은 누운 채 생각한다.

“혹시 나랑…”

“그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으음.” 천사는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에단 위에서 잠시 꿈지럭거렸다. 어딘가 아픈 것 같았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에단은 루이 밑에 깔린 채 잠시 우물쭈물하는 양을 보다가 결국 말을 걸었다. 뭐가 문젠가.

“아니, 별로…, 문제는 아니다만.” 천사는 그러나 주절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다양한 종류의 쾌락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네. 어떤 인간들은 미성숙한 타인이나 시체, 부상자, 잠든 자, 심지어는 짐승과 교접하기도 하지. 혹은 구타당하거나, 베이거나, 갇히거나, 타인에게 보이거나, 여럿이 하거나, 특정한 모양에 욕정을 느끼는 인간도 보았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에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것은 심각한 죄악이군.”

“알아. 나도 전부 보았네.” 루이는 상냥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했지.”

 

에단은 천사의 흐르는 금발이 눈을 살짝 가리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그의 눈은 잠자리를 앞둔 어떤 인간과도 다르게, 이질적으로 에단을 살피고 있었다. 이 천사는 욕망의 어떤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굳이 구분 짓지 않는 것일까?

“내게… 죄를 만든다고 생각하나?”

“어떨까. 말해 보게.” 루이는 천천히 몸을 가까이해 오더니 에단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아마도, 네가 말한 것에 비하면… 내가 바라는 건 평범할 것 같군.” 평범하다는 말에 루이가 숨죽여 웃었다. 이상한 짓은 않을 건가? “어떤 게 이상한 짓이지?” 에단은 순수한 궁금증이 든다. 루이의 손이 에단의 턱을 타고 맥 뛰는 여린 살을 거쳐 옷 안쪽을 슬며시 들췄다. 그가 에단의 뺨을 타고 키스해 오는 동안 손가락이 어깨를 더듬었다. 그게 마치 화상을 입히는 것 같다. 열기가 모여 머리를 핑 돌게 하듯이.

“나도 모르네.” 루이는 비로소 답한다. 에단은 쿵쿵대는 심장을 안고 루이를 바라보았다. 루이는 동그란 눈으로 에단을 마주 응시했다. 어쩌면 그도 처음일지 모른다. 평범한 인간들이 하는 평범한 섹스가 어떤지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 천사에게 가르쳐줄 일은 아닐 테다.

“그럼 일단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그 말에 루이는 실없게 웃는다. 하나 더 있네.

“뭔가.”

 

그게, …남성이 좋은가, 여성이 좋은가? 에단은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루이를 아래위로 훑으니 다소 민망한 듯이 시선을 피한다. 분위기를 깨 미안하지만 물어야 했네. 준비가 필요해서 말이야. 최소한 여기 분위기가 있단 건 아는군. 에단은 생각한다.

“네가… 맞다고 느끼는 쪽으로 해라.” 겨우 대답하고서 에단은 이만 침대에 머리를 눕혔다. 천사랑 자기 한 번 어렵군. 입 가벼운 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천천히 어지럼증이 인다. 천장을 보고 있자니 루이가 금방 체중을 실은 채 시야에 얼쩡댔다. 에단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천사는 이제 준비되었다는 듯 몇 번이고 그에게 키스를 퍼부어 준다.

 

그대로 가라앉아 준다면, 에단은 멈추라고 할 생각이 없다. 손가락이 얽히고 혓바닥이 엉기고 뜨거운 살이 닿을 때에 그는 말을 잃어버린다. 다만 말캉한 속을 남김없이 끌어안고 휘젓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루이가 그의 여덟 날개로 고치를 만든다면 에단은 그 안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 내린 덩어리가 될 것이다. 이건 이상한 짓인가? 에단은 차마 욕망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할 수 있다면 영혼까지도 엉겨 붙고 싶다. 그러면 죽은 후라도 떼어 내기 힘들 것이다. 천사의 짧은 웃음소리가 멜로디처럼 에단의 귓가에 맴돈다. 그건 밭은 호흡이 되더니 울음 섞인 신음이 되기도 했다.

 

 

 

 

 

 

루이는 인간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벗은 옆구리 뒤쪽에 작은 원을 그렸다. 깊은 흉터 있는 곳이다. 내장에 상처가 생길 수도 있는 깊이다. 무척 고통스러웠겠지. 작은 인간이 견디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에단이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간지러운가? 루이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소 지었다. 콩콩 뛰는 심장 위쪽에 입을 맞추고 루이는 입을 열었다.

“그대 몸에서 술 맛이 나네.”

“방금 마셨으니 그렇겠지.” 에단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군. 루이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의 인간을 바라본다. 에단도 루이를 보고 있었다. 호박과 재의 빛깔. 의지와 경계가 서린 얼굴. 이 인간에게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해 달라는 일은 전부, 넘치도록 부어 주려고 했다. 어떻게 해야… 문득 에단의 손이 얼굴을 감싸 왔다.

“내가 또… 읽히는 표정을 했나 보군.” 루이는 느리게 말했다. 에단은 적당히 대답을 흘린다. 뭔가가 훤히 보인다면, 에단은 그것도 알 수 있을까? 루이는 전에 에단을 공격하던 대리석 같은 얼굴을 해 보였다. 먼 곳, 어떤 실체를 응시하는 무표정.

“원한다면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네.”

“그러지는 마.” 에단이 부탁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으므로 천사는 금방 풀어졌다. 그는 얼굴에 얹힌 손을 만지작대기 시작한다. 알겠네.

 

에단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가 다시 깜빡인다. 루이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이 잠들고 난 뒤에 옮겨도 상관은 없을 테다. 천사는 꿈틀꿈틀 다가가 에단의 따끈한 몸을 꼭 끌어안았다. 인간들은 신체 접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이는 잠들지 않는 눈을 뜨고 잠시 귀 기울였다. 소리, 그의 인간이 내는 느린 숨소리. 아래층의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 액체가 잔을 채우는 소리, 쓸쓸한 구역질, 조급한 입맞춤, 절망에 찬 비명, 풀벌레, 물이 흐르고 강바닥에 잠긴 물고기들이 작게 아가미를 뻐끔대는 소리, 올가미를 이루는 섬유가 사각대는 소리, 이 땅이 두려운 속도로 자기 궤적을 따라 회전하는 장엄하고도 기괴한 소리가, 한없이 낮은 곳에 있는 대천사의 정신을 찌릿찌릿 울렸다.

나는 실패하는지도 모른다. 루이는 생각한다. 그가 에단을 조금이라도 타락시켰느냐 하면 아니다. 오히려 에단은 그가 오기 전이나 후나 거의 동일한, 오히려 죽음을 앞둘수록 더 경건한 인간이 되어갔다. 문제는 자신이다. 언제나 문제는 루이였다. 루이는 내장의 겉과 속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입술을 깨물어 참는다. 내용물이 껍질을 이기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인간에게 입맞추고 마주 끌어안을 때마다 루이는 점차 일그러지고 있다. 본래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사랑하는 천사이므로 인간이 원하는 일은 모두 이뤄주고도 남아야 한다. 수호천사로서 가까이 오라 하는 인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루이는 에단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떻게 그는 괜찮을 수 있지? 천사와 자고도 이 선함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천사가 알기로 천사를 그의 내밀한 망상에 넣고 저울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이 인간에게는… 순수하게 그가 옳다는 믿음이 있다. 그가 걷는 길을 신이 허락할 것이라는 맹세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는 신을 증오할 수 있을 정도로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가올 운명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이 놓인 시간을 살 뿐이다.

그리고 루이는, 인간이 무언가를 욕망하는 일 자체를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모두 본성을 따랐다면 세상에 선한 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겠지만, 그의 에단은 스스로 믿는 신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한 톨의 불신이나 과잉도 없이. 루이를 거기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많은 선한 자들이 신을 자기 안에 들이는 것처럼.

 

의심하는 자는 자신밖에 없다. 그게 문제다. 루이는 에단과 입맞춘 뒤부터, 질문하고 시험하기를 멈출 수 없다. 이건 이상한 짓일까? 타락의 소산인가? 사라지는 왜소한 별빛이 그를 향해 쏟아질 때 루이는 이따금 신을 잊는다. 그의 눈 안에서 수호천사의 임무나, 진실과 거짓의 판별이나, 다른 모든 인간들의 감정은 천천히 사라지고 에단만이 남는다. 루이는 광활하고도 숨막히는 공간 속에 홀로 있어, 서서히 지독한 그리움을 느끼고 만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루이는 언제나 무지하고 나약한 인간을 비추는 빛이 될 터였다.

언젠가 잠든 인간 옆에서 루이는 흘러가는 시간을 느리게 조정해 본다. 그렇지 않아도 긴 밤이건만 영원처럼 늘어지고 만다. 이대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인간은 죽지 않고, 아름답게 걱정 없이 루이 옆에 잠들어… 여기 정지해 있는 것이다. 대천사는 언제까지고, 질릴 만큼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다시 온 몸이 저려 왔다. 나는, 이상한 짓을 하길 원하는 건가? 이는 마치, 죄 같지 않은가? 어떤 존재보다 완전에 가까운 내가? 인간은 치가 떨릴 정도로 여전히 경건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 줄 수호천사…. 그러나 루이는 이윽고 완벽하게 박살이 나고 말 테다. 그는 추락하고 있다. 대천사가 하는 일이라 믿을 수 없는, 지저분한 실패다. 결국에는 무언가 끓는 것을 토해낼 것 같아 루이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루이 님.”

소스라치게 놀란 대천사는 뒤를 돌아본다. 익숙한 형상이다. 그는 후광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날개고 몸통이고 새카맣게 보였다.

“주인께서 부르십니다. 가시지요.”

듣지 못한 호출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잠깐만, 루이는 팔을 들어 저지하려고 했다. 잠든 인간을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서늘했다. 당장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이의 발 밑에 구멍이 열렸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할 일이,”

“아득한 존재시여, 죄송하지만 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시간을 멈추는 권능은 불행히 통하지 않았다. 실체는 급히 부유하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루이는 끌려들어갔다. 떨어지는 찰나에 대천사는 마지막 시선을 그의 인간에게 보냈다. 잠깐만,

 

 

 

 

 

 

에단이 눈을 뜰 때는 막 해가 뜰 즈음이었다. 낯선 음식 냄새가 났다. 어제 도망친 채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에단은 튕기듯 일어난다. 제기랄. 루이. 옆을 보니 아무도 없다. 본래 항상 거기 있어야 할 텐데, 방은 어제 비운 술병 외에는 텅 비었다. 떨어진 옷을 대강 걸치며 에단은 천장과 바닥을 살핀다. 소란한 기색이 아래쪽에서 났다.

 

“루이.” 작게 불렀지만(음량은 언제나 천사에게 큰 문제가 못 되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에 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에단은 갑자기 목에 쓸리는 밧줄을 느낀다. 서둘러야 했다. 차가운 손으로 얇은 살가죽을 더듬는 사이 정확히 그가 있는 방문이 부서지듯 쾅 소리를 냈다.

“에단 아스터 버틀러. 여기 있었군.” 얼굴을 가린 자들이 차례차례 들이닥쳤다. 말을 꺼낸 자는 참을 수 없이 지루하다는 투였다. 도망친 죄수를 잡는 일이 보통 그러하듯.

여기까지 어떻게 도망한 거지? 간수들이 형편없었나 보아. 항상 간수들은 이 모양이지! 우리를 개처럼 다룬단 말야. 그러나 차라리 잘 되었다. 이대로 교수대까지 인도하면 되겠군. 군인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떠들어 댔다. 에단은 굳은 채로, 본능적으로 공격하려는 충동을 참아 냈다.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다는 변명은 아마 통하지 않을 테다. 애초에 외출하자는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알고 있겠지만, 법정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는 판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좀더 멀리 가지 그랬나? 그들은 마치 재미있는 농담을 하듯 창으로 위협하고는 에단에게서 검을 빼앗았다. 그는 곧 바닥에 강제로 꿇어앉힌 채 팔이 묶인다.

“아무튼, 협조 고맙군. 살인자.” 에단은 계속해서 눈으로 루이를 찾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가장 기겁하며 재잘댈 생물을. 저 인간들을 모조리 때려눕힐까? 같은. 애초에 상황 제공자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천사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곳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지난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결말을 확실히 정해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사의 딜레마 5(完) +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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