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물날조AU. 커플링요소 없음. 우울함.
교실 문을 열기 전엔 눈을 감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란다. 몇 년 묵은 이음새가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릴 때에 누구도 그 작은 소리를, 한 순간 끼쳐오는 공기를, 이윽고 그 뒤에 누가 서 있는지에 대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기 바란다. 그런 일은 없다. 베린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와 관계없이 누군가의 시선에 걸리고 만다.(그 같은 인간은 조금 투명해져도 무방할 텐데. 교복 탓이다. 새 교복이라도 그때그때 사 주었다면 이토록 불필요하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눈. 아주 낯선 것을 보듯한 눈. 그러면 베린은 그가 무엇을 말하건, 어떤 몸짓을 하건 모욕당했다는 느낌을 감추기 힘들다. 어쨌든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복 안의 어깻죽지 뒷부분이 가려웠다. 베린은 가려움을 참으며 천천히 자기 자리를 향해 걸었다. 어쩌면 저 빈 자리였나? 자리를 너무 옮겨서 어디가 자기 자린지도 알기 어려웠다. 누가 무어라 하지 않으니 그는 가만히 앉아 이 모든 시간이 큰 고통 없이 지나가길 바란다.
어쩌면 전학과는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베린 자신이 도무지 학교와는 어울리기 힘든 이종(異種)인지 몰랐다. 어차피 친하게 지내달라고 간절히 부탁할 요량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없는 셈 치기 바랐다. 가다가 쓰러지건, 아무리 기침을 심하게 하건간에. 그러면 베린은 펄떡이는 생선처럼, 차에 치여 오래 지난 작은 새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점점 죽어갈 것이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그게 해방일 테다. 베린에겐 죽는 게 참으로 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금발이 있다. 금발은 베린이 있는 곳에서 두 열 건너 있어 처음엔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목청이 하도 좋아 웃는 소리가 엎드린 귀에도 윙윙 울렸다. 멍청하고 시끄러운 애들. 베린은 무거운 머리를 들어서 주인을 확인하려 하지만 가로막은 덩치 때문에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재밌는 건 다들 그와 진심으로 웃질 않고 비웃었다는 점이다. 베린은 그 차이를 안다. 웃음보다 비웃음이 훨씬 즐겁다. 입술 사이로 픽 나오는 조소. 금발도 그걸 알는지는 모를 일이다.
양호실에서 종종 밥을 먹지만 그날따라 컨디션이 괜찮아 베린은 학교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급식소는 부담스럽고 교실에도 저마다 모여 있어, 그 사이에 혼자 있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것이다.(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지만 베린은 어려운 고비를 너무 많이 봐서, 어떤 고비는 그냥 보고 싶지도 않았다.) 뒤뜰은 쌀쌀한 바람이 이따금 불지만 지저분하잖고 고요한 공터였다. 베린은 한 손의 도시락을 내려다본다. 지루한 식단이다. 언제건 먹는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으려다 베린은 나무 뒤편의 금발과 마주친다. 금발은 다급히 뭔가를 수습하더니 엉거주춤 일어났다. 누군가?
“넌 누군데.”
“루이라네.” 금발은 자기 이름을 말할 때 의기양양했다. 이도 참 가지런하다. 혼자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든 게 틀어졌다. 베린은 아, 하고 이만 그 자리에서 멀리 벗어나려다 금발의 목소리에 멈췄다. 그대 이름은 말하지 않을 셈인가?
말투 웃기네. 베린은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어차피 외울 이름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아까 반에서 들은 것 같은 목소리다. 그럼 같은 반인가? 생각하는 사이 금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너무 급했는지 비틀거리다 베린이 서 있는 곳 가까이까지 휘청거리고 만다.
“실례.”
이상한 데서 휘청거리거나 쓰러지는 게 얼마나 부끄럽거나 나아가 화가 나는진 베린도 잘 알았다. 그러나 굳이 공감했다는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베린은 그가 빨리 없어지면 거기서 식사를 해치우려는 속셈으로 건성건성 대답한다.
혼자 앉아 보니 썩 괜찮았다. 아무도 오지 않아 쾌적했고 미미한 향기가 났다. 베린은 특히 불필요한 소음이 싫었다. 원하는 소음만 듣는 게 좋다. 드럼은 심장처럼 쿵쾅대고 베린은 그 수를 센다. 팔십. 백이십. 백오십.
▒▒▒
일이 주를 입원 없이 지내면서(어쩌면 건강해질지도 모른다! 베린은 언젠가 건강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두려웠다. 가슴이 부풀어서 공중에 뜨는데 그게 싫기도 했다. 꼭 떨어지기 때문이다.) 베린은 새로운 사실 몇 개를 알았다. 그게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된 건 아니다. 지나치게 착해서 오히려 뻔한 동정을 베푸는 애, 그냥 아무나 치근대는 애, 반장 따위의 말을 튼 아이들은 있었으나 베린은 모두 귀찮았다. 특히 루이 그레이스와는 더더욱 친할 수가 없다. 가장 많이 알아낸 게 루이에 대한 사실인 점이 아이러니했다. 다들 그에 대해 얘기하기 좋아했기 때문이다. 걔는, 어느 외국 기업체의 후계자고, 그런데 얼마 전에 도산했다. 쫄딱 망한 건 아니지. 그동안 모은 재산이 얼만데. 그래서 해외까지 피신을 온 거다. 거의 왕족이지. 사는 세계가 달라. 여름엔 요트를 타고 봄엔 승마를 했대. 비싼 맞춤 정장, 아니, 자기 빌딩이 있었을지도 몰라. 벽난로 위에 걸 만한 자기 초상화도. 그런 애는 접시는 저절로 반짝이고 구두가 혼자서 닦이는 줄 알겠지. 그런데 자기 나라에선 개 욕먹더라.
사람으로 볼 때 그는 명확히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다. 그가 사람인가? 가끔은 천재나 광대 같기도 했다. 옆 클래스에는 그를 못내 칭찬하고 맞장구치는 몇몇이 시종 비슷하게 있었다. 베린은 배알도 없는 멍청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진 겐가?”
미친놈. 베린은 거의 웃을 뻔했다. 루이 그레이스는, 비록 왕족일지 몰라도 제대로 돌아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대단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다. 누가 그럴 수 있는가? 베린이 알기로 완벽함이란 지속되지도 않고 마치 빠져나가는 연기와 같다. 그런데도 그렇게 공언하는 점이 그 손으로 햇빛을 가리는 듯한 엉성함을 더욱 빛나게 한다.
베린은 우스꽝스러운 혐오가 결국 무엇도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향함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루이가 돌아 있다는 사실은 참이었다.
▒▒▒
루이와는 어쩌다 뒤뜰에서 또 마주치게 되었다. 베린은 이제 루이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같이 있는 게 두렵진 않았다. 다만 거슬릴 뿐이었다.
“좋은 점심이로군.”
같은 반 학생끼리 하기엔 어색한 인사였다. 그러나 루이에겐 모든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베린은 대꾸하는둥 마는둥 가능한 멀리 앉았다.
“안색이 좋지 않네.”
“원래 그래. 신경 꺼.”
“이렇게 파리하게 있으니 어찌 걱정 않을 수 있겠나?” 베린은 하마터면 마음이 동할 뻔했으나 기분 탓이었다. 대답하려다 기침이 나와 목이 쓰리게 아프기 시작하니 굳이 말을 건 상대에게 성질이 났다. 정확히는 정말 아픈 티를 낸 게 부끄러웠다. 대답을 않자 루이도 더 입을 열려다 마는 것 같았다.
“홍차가 좀 있으니 들게.”
안 받을 수는 없었다. 홍차는 따듯하지만 달아서 건강에 좋지 않게 느껴졌다. 루이는 보온병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왕족은 차도 두 종류를 마시나. 베린은 생각한다.
베린은 자신이 죽은 뒤를 손쉽게 떠올린다. 죽음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베린은 적어도 때가 왔을 때 살려달라고 간절히 빌진 않을 거라 예측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다.
루이 그레이스도 자기가 살아온 세계가 망했다면 좀더 의기소침해도 좋을 것이다. 며칠 입원했다 돌아간 학교는 공기에서 차가운 냄새가 났다. 루이는 반장을 하겠다고 설치다 쿠데타에 실패하자 연극부로 노선을 틀었다고 한다. 베린이 티끌만큼도 궁금해하던 사항은 아니었으나 소리가 들리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청력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연습 시간 아냐.”
“그런가? 오, 그렇지. 그대는 돌아와서 기쁘군.”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으나 베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을 공기를 조심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루이는 어딘가 정신이 팔린듯 대답하고도 엉덩이를 떼긴커녕 벽에 멍하니 기대 있을 뿐이었다. 베린이 남의 부활동에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평소처럼 정신사납도록 자기 미모에 대해 떠들거나 칭송하라고 주절대지 않으니 여상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것 같기도 했다.
의미 없는 수다를 제외하고 무엇이든 채우기 좋은 적막이 흘렀다. 베린은 멜로디 몇 개를 속으로 흥얼거린다.
“잃은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베린은 애초에 갖고 있지도 않은 걸 바라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루이 그레이스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잃은 게 무엇인줄 알고 그러는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거기서 대화는 끊긴다. 루이는 이제 허공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그건 어딘가 달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낮에 달이 뜰 리는 없어 루이 그레이스 혼자 미쳐 있는 것일 테다.
“얼마나, 얼마나 해도” 베린은 어떻게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 같은…”
스스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몰라도 베린은 일어서서 루이에게 와락 가까이 섰다. 야,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조용히 좀 하자. 가슴이 쿵쿵 귓가에서 울렸다. 그건 진짜 협박만큼 대단하게도 위협적이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기어가는 소리 같았다. 내가 네 혼잣말까지 들어줘야겠어? 나는 네 친구 아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네가 어울리는 데 가서 그러던지. 바보 같아. 그런 말들은 조금도 나오지 않고 어딘가 깊고 숨막히는 곳에 가라앉았다.
루이는 감은 눈꺼풀을 뜨고 초록 눈으로 물끄러미 보더니 미안하네, 했다. 베린은 훅 끼치는, 이제 정말 놓칠 수 없는 냄새를 맡는다. 익숙한 냄새다.
“뭔가 잘못됐나?”
거세게 콜록대자 루이는 당황한 것 같았다. 네 향수가 잘못됐나 보지, 쏘아붙인 베린은 본래 해야 할 말을 얼버무리고 만다.
▒▒▒
돌아가는 길은 따로따로였다. 베린은 부활동 종이 치기 전에 돌아왔다. 어차피 향하는 교실이 같아 그 편이 이상한 동행을 방지할 수 있었다. 베린은 생각한다. 학교에서 취해 있어? 알콜 향이 아직도 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건 병원에서 나는 소독솜 냄새가 아니고 좀더 사과 같기도 하고 포도 같기도 했다. 진짜 미친 놈이야. 왜 그런대? 그런데 좀 우습기도 해. 해야 할 일을 두고 굳이 취해서 주정이나 부리고 있는 게.
빙글빙글 도는 루이의 시선이 꿈에 나왔다. 루이는 향수를 바꾼 뒤 은근슬쩍 티를 냈고 베린은 무시하기로 했다. 루이 그레이스는 친할 수가 없는 애였다. 억지로 마취제에 취해 있는 것도 아닌데 걔는 일부러 취해 있더라.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사랑받지 못한다는 건 그런 거야. 베린은 쏘아붙여 주고 싶다. 아니면, 그냥 조용한 루이 그레이스 옆에서 가만히 흔들리는 리듬을 듣고도 싶었다. 그애는 뭘 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고 베린은 본래 아무도 무언가 시키질 않으니까. 빠르게 뛰는 심장처럼 울리는 박자를. 팔십. 백이십. 백오십.
처음 쓰는데 캐해석 다 씹어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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