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하이틴로맨스(?)
(주의를 꼭 읽어주세요: 미성년자 알콜중독. 주위 사람의 사망. 가스라이팅.)
더불어 섹스 중 리버스 언급이 있습니다.
추천 BGM: Koh samed - 하현상
떠오르는 아침해만큼이나 지겨운 날의 시작이다. 화창한 해가 지겹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던가. 에단은 꼿꼿이 일어나 침구를 개고 방을 나섰다. 새벽은 내려앉는 먼지 냄새가 났고 누구도 눈을 뜨지 못한 가운데 기숙사 나뭇바닥을 먼저 밟는 이는 항상 에단이었다. 다섯 시 십이 분. 뛰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에단 아스터 버틀러는 명예로운 구 버틀러 가문의 성공 가도를 착실히 밟고 있다. 아버지의 친구라는 치들이 종종 그렇게 말했다. 에단은 숨을 몰아쉬며 물 그친 분수대 옆을 빙 돈다. 그렇게 되는 게 목표인 적이 있었다. 어떤 영광을 되찾는 것이. 여전히 남들은 그렇게 말해 왔다. 에단은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 뛰고, 뛰고, 계속 뛰고, 그리고 어느 순간 어디까지 왔는지를 잊어버릴 즈음에 멈춘다. 심장 박동이건 호흡이건 엉망진창이었고 종아리가 비명을 질렀다. 에단은 눈을 질끈 감고 떴다. 여전히 아침이다. 새들은 비명처럼 울었다. 학교 동관이었다.
이안이 마지막 숨을 내쉬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그 후로 모든 것은 검은 진흙에 빠졌고 에단은, 오랜 버릇대로 움직이면서, 진흙 속에서 할 일을 겨우 건져냈다. 사람들은 쉽게 다시 웃었지만 에단은 본래도 웃거나 재미를 느끼는 법을 잘 몰랐다. 이제는 저 먼 데까지 뻗은 파란 하늘을 보면 숨이 막혔다. 그건,
작은 이안이 봤어야 하는 하늘이다. 에단은 어쩌면 잘못 살았는지 모른다. 남의 몫을 어쩌다 잘못 살아 버린 것이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스스로 깨닫는 삶의 진리가 있는 법이다.
이안은 말을 다소 더듬고 잘 웃는 아이였다. 잔정이 많고 툭하면 겁을 내기도 했다. 에단은 과외를 위해 그애를 만났다. 가문의 친구였다. 그렇게 약해지지 말았어야 했다. 어느 날 그애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에단의 품에 파고들었고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장 쓰라린 부분이 되었다. 손가락을 얼음장에 대면 쩍 달라붙듯이. 아니, 어쩌면 에단은 영영 약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안이 죽고 다시 돌아가야할 때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쩔 줄 몰랐으므로 도망치듯 기숙학교에 왔다. 그게 벌써 몇 개월째였다. 검은 진흙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했다. 검은 진흙 안에선 검은색만 보였다.
싸늘하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끌어올리면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 남들은 에단을 경외하거나 멸시했다. 그는 천재 펜싱 선수였고 프로급 못지않았다. 경기의 기복이 있긴 했으나 팀에게는 유망주였다. 낙제 딱지를 받아오는 몇몇과는 달리, 질릴 정도로 우수하기까지 했다.(그들을 에단이 신경쓰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주위 팀원들은 에단에게 꼬박꼬박 인사를 해 왔고, 에단은 예의있을 정도로만 대했다. 그 날의 훈련은 특별하지 않았다. 에단은 유니폼을 정비하다 체육관 저편에서 흔들리는 카나리아빛 머리를 본다.
“최소한 안 보이는 데서 마시지.”
“깜짝이야. 기척을 내게!" 루이는 새된 소리를 내고는 딸국질을 시작한다. 에단은 그대로 돌아 나가려는 충동을 이겨냈다.
“이 몸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나? 게다가, 뭘 마신단 건가?”
“브랜디 냄새나 풀풀 풍기면서 잘도 말하는군. ...하찮은 놈. 몸이나 가눠라.” 그 말대로 루이는 벽에 모든 무게를 의탁하듯 몸을 기대고 있었다. 에단은 그가 비실비실 웃는 걸 찌푸린 눈으로 노려봤다.
“생각해 보겠네.” 곤란하게 굴지 말고 이만 꺼지라는 뜻이다. “저녁에 거기서 보겠나?”
에단은 대답을 않았지만 루이는 알아들었다는듯이 고개를 돌리고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어딘가 풀린 눈은 제대로 초점을 잡는 일이 드물었다.
“다음 주부터 연달아 연습 경기지 않나?”
“잘도 아는군.”
“그대는 팬이 많아서 말일세. 에단 아스터 버틀러.”
침묵.
“풀네임으로 부르지 마라.”
“왜인가?”
“일일이 말해줘야 하나?” 가문의 이름이 같이 불리면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고 만다. 좀더 얕게는, 그저 기분이 나빴다. 에단은 더이상 대꾸가 돌아오지 않도록 부러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낸다.
“그럼 에단.”
“왜.”
“아닐세.” 루이는 그러나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에단은 몇 걸음 옮기고 넥타이를 확 잡아당겨졌다. 예상 못한 기습에 균형을 잡는 사이, 루이는 혀를 작게 내밀어서 에단의 입술을 새가 쪼듯 핥는다. 에단은 그를 확 떼어 팔꿈치로 벽에 밀어붙여야 했다. 뒤를 불안하게 돌아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에단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학교니까 그만 해라.”
“뭐 어떻단 말인가?” 루이는 그러나 반항하지 않고 에단이 멀리 적정거리를 유지할 때까지 가만 있었다. “실망스럽군.” 에단이야말로 그랬지만 마주 쏘아붙이진 않았다.
루이와 친구냐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무얼 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 즈음에 에단은 집에 가는 방향의 재개발 구역에 들렀다. 루이는 다 낡은 커다란 소파 위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한참이나 큰 소파에 구겨져 있으니 아이 같았다.
에단은 어떻게 말을 꺼내거나 행동해야할지 몰라 그냥 그 앞에 선다. 그러면 루이가 먼저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곤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붓는 것이다. 부드럽게 문지를 때마다 욕망이 새어나가는 입맞춤이었다. 아랫배부터 따끈따끈해지는 감각에 에단은 눈을 질끈 감고 이만 무릎이 꺾이도록 허락한다. 루이만이 그럴 수 있는 것 같다. 에단은 급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장미향을 조금씩 삼켰다. 어딘가에 잠기는 것 같은데, 검은 진흙은 아니었다. 잘못 움직이면 뭉개질 것 같은 연약한 표면-그러나 루이는 생각 외로 단단해서 여태 부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에단은 루이의 쇄골이 어깨와 맞닿는 근처를 깨물면서 생각한다. 이런 인간이 여기서 나랑 이러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되는군. 금발이 흔들리면서 코끝을 간지럽혔다.
루이는 굳이 말하자면 가정교사를 두고 제왕학을 배워도 될 법한 집안이다. 누구라도 루이 그레이스와 비교 대상에 놓이면 자신이 알아왔던 부요함의 경지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도 자자했다. 본인이 자기 사촌과 같이 다니길 주장했다고 하지만, 에단이 보기에 굳이 학교에 대단한 사명감이나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에단의 허벅지에 헐떡대면서 비비던 루이가 앓는 신음을 냈다. 아주 얇은 천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아 살 위에 섬세하고 부드럽게 쓸렸다.(당연하게도 비단이다.) 루이의 손가락이 옆구리를 스믈스믈 기어와 엉덩이를 꽉 쥐었고 에단은 더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공사장의 미미한 먼지바람이 닿지 않은 살 끝을 차갑게 후리고 나니 더욱이 열 오른 타인의 살에 온 몸이 떨어질 곳 없도록 닿게 하고 싶었다.
예쁜 눈꼬리 끝에 고인 눈물을 닦으니 루이가 미소짓는다. 하마터면 애정을 느낄 법한 웃음이다. 에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순식간에 착장했다. 그런 버려진 곳에서 그와 오래 벌거벗고 엉겨 있는 일도 못할 짓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어느 날 루이가 하자고 했고 에단은 홀린 듯이 알겠다고 했을 따름이다.
루이는 에단이 알겠다고 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에단은 초록 눈을 마뜩찮게 내려다본다. 그냥 아무나 잡아본 건가? 어차피 자신에겐 조금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란 걸까? 에단이 얼마나 천하면 대궐 같은 집에 부르지도 않는다.(갈 생각도 없지만) 에단은 누구에게도 루이와의 일을 알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 알아챌 거란 생각만 해도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이나 입에 사정할 때의 감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검은 진흙 속에서도 그나마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루이가 손가락 뼈 하나하나 잡아먹을듯 키스해오면 척추 끝까지 전류가 통하는 것 같다. 감히 그런 쾌락을 오래 곱씹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았다. 감정을 끊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간다.”
“다음에 보세.” 루이는 나른하게 대답하고, 에단은 그러자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한다.
▩▩▩
레인이 넥타이를 매주는 동안 루이는 가만히 있었다. “또 낙제 직전이십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훈계하듯 루이의 뒷목을 훑었다. “잘 하고 계시는군요. 누구 보라고 그러시나요? 상관없다 이건가요?” 루이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입을 연다. ‘이제는 존대를 쓰지 않아도 괜찮네.’ 그러나 말은 입 안에서만 뱅뱅 돌았다.
“제가 낙제했을 때는 아버지께 오동나무 회초리로 손등을 맞곤 했지요.” 그의 손이 목 근처를 쓸었다. 루이는 키스마크가 남았을까 잠깐 고민했다. “다 되었어요.” 매듭 끝을 매만지던 손이 떨어졌다. 그제서야 루이는 참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미안하네.
“무엇이 말입니까?” 레인은 갑자기 웃고 루이는 혼란스럽게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의 가산이 거의 압류되었다는 사실은 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더 큰 규모로의 이전 및 합병이었기에 티도 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버지는 충격으로 정신을 되찾지 못했고, 루이가 어떻게든 구해보려 하던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래봤자 그는 17살일 뿐이었다.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고 루이는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가족을 망쳐 버린 서류 뭉치를 제쳐 두고 아버지의 서랍을 뒤졌다. 무언가라도 있길 바랐지만 고급 위스키 몇 병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눈물이 언제 흘렀는지 얼굴이 온통 축축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조정’되었고 모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돼지가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레인은 루이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느닷없이 세계에 내던져지고 보니 루이는 까마득히 아무 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그가 멍청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불행으로, 심하게는 죽음으로 몰고 갔다. …따위를 모두 남의 일이라 생각하더라도 가까이에는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쨌든 그는 청소년이고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하기에 루이는 먼 사촌형 레인과 같은 학교에 배치되었다. 다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루이가 잘 하는 일은 아무짝에도 없다. 레인이 매일같이 그랬다. 예쁘장하지만 않으면 그만 봐줄 수가 없는 꼴… 찌푸리지 마세요.(하지만 레인은 루이가 웃는 모양도 싫어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뒤로는 눈 밑이 파랗고 살이 빠져 예전같지도 않았다. 루이는 그래도 거울을 한참 바라볼 때가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얼마나 낯선지 말을 걸면 꼭 대답할 것만 같다. 하지만 말을 걸기 무서워서 루이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학우들은 그나마 상냥했다. 루이에게 곧잘 말도 걸고 가끔은 장난도 쳤다. 루이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환심을 샀다. 오늘도 아름답군, 루시. 점심 메뉴는 봤나? 아놀드 그대는 고기를 줄여야 한다면서. 하지만 모두가 진실을 모르는 이상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진실은, 루이는 사랑하기 어려운 혐오스러운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루이는 갑자기 몸이 땅으로 꺼질 것 같으면 엎드렸다. 그러고 이동 시간이 되면 아주 학교 밖으로 나가 작고 휙 도는 액체를 몇 모금 마시고 왱왱거리는 세상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에단 버틀러를 보면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루이는 그가 움직이기 전까지 멈춘 조각 같다고 생각한다. 에단의 양쪽 눈이 어떻게 서로 다른 빛을 띄는지 감상만 하는 일도 즐거울 것이다. 그는 자신과 달리 매사에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며 빛이 났다. 곧 주장이 될 거였다. 그의 인생은 비록 험하더라도 곧게 원하는 것을 이뤄낼 것이다. 경기를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그런 확신이 들게 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반응이 싸늘하더라도 다들 에단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 테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루이는 전혀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절박하게) 불렀던 일을 떠올린다. 에단은 놀랍게도 손목을 잡혀 주고 서툰 키스에 일일이 응했다. 잠깐의 재미를 보려는 심산인지 모른다. 루이가 그런 척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버려진 곳에서 그들은 자주 급하고 빠르게 섹스했다. 에단은 드물게 다리를 열어 주기도 했다. 보통의 남자애라면 자존심 상한다고 여길 수 있는 일이다. 자기 남성성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에단은, 조금 낯설어하는 기색 외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루이는 에단 위에 올라타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았다-에단이 하고 싶기만 하면은.
그는 사실 상냥한 게 틀림없다.(자신 같은 패배자와도 어울려 주는 걸 보면.) 루이는 모든 게 망상임을 알면서도 어찌어찌 이어간다.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그나마 설탕 같은 기분을 잠깐 맛볼 수 있었다.
루이는 희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어쩐지 감기 기운이 들어서 약품함에 널린 감기약을 되는대로 삼켰더니 어지러웠다. 루이는 침대 밑에 있는 술병을 생각한다. 주정뱅이보단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루이는 ‘더 좋았던’ 때를 떠올린다. 그랬더니 오히려 더 깜깜해졌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레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돌았다. 그는 아랫층에 있을 터였다. 루이는 스스로를 질책해 본다. 조용히 잠에 들자. 금방 지나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을 구원할 잠은 오지 않고 몸은 차가워져 저도 모르게 벌벌 떨렸다. 루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애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푹신했던 침대는 이제 작은 낚시 갈고리 따위가 와글와글 모여 루이를 찌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땀을 주륵주륵 흘리며 루이는 에단을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이겠지. 학교에서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루이가 모든 것,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망친 줄 알면 더욱 혐오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없었던 사람처럼 지나치겠지… … 어느 순간 루이는 눈앞이 흐렸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없었다. 현기증을 느끼며 루이는 허겁지겁 침대 밑을 더듬었다. 맛도 느끼잖고 왈칵 넘기니 뜨거운 기운이 위장까지 타고내려갔다. 그렇지만 애초에 숨길 수 있을 만한 작은 병이어서, 정말 몇 모금이 다였다. 루이는 이만 모로 웅크려 속눈썹을 적시는 눈물을 그냥 흘러가게 두었다.
취기가 서서히 올라와 더욱 어질어질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멍해질 지경이었다. 루이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충동적으로 휴대전화를 찾았다. 전화부에서 에단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일단은 받아 뒀지만 전화해본 일은 없었다.
“루이 그레이스.”
그는 굉장히 금방 답했다. 루이는 이 시간에 뭘 하려느냐고 물으려다 시간이 그다지 늦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좋은 저녁.”
건너편은 침묵이 돌았다. 용건을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루이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차라리 그애가 받지 않는 게 나았겠다. 에단은 뜸을 들이다 문득 말했다.
“목소리가 엉망이군.”
루이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에단이 놀랄 것 같았다.(지를 힘도 없었다.) 멈췄던 울음이 다시 나왔다. 그렇게 약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특히 에단에겐 그랬다. 에단이 몰랐으면 하는 일들이 많았다. 어쨌든 점점 최악의 모습을 보게 되겠지만. 루이가 잘 하는 일은 그런 것 같다. 공들여 세운 탑을 다 부숴 놓는 일 따위 말이다.
나는, 꼭 익사하는 것 같네. 루이는 정말로 숨이 막힌 것처럼 색색대는 소리가 나왔다. 전화로는 못 들을지도 모르는 작은 음성이었다. 내가 또 망칠 건가 봐. 에단의 차분한 물음이 들려 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루이는 점점 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대를 사랑하는 것도 같네. 그 말을 중얼거리고 루이는 식은땀에 절어 마침내 기절했다.
▩▩▩
“해명해라.”
“뭘 말인가?” 루이의 시치미 떼는 기술은 날로 발전하는 것 같았다. 에단은 화가 치미는 걸 참으며 루이를 천천히 벽으로 몰았다. 어제 전화한 건 기억나냐고 물으니 아아, 하고 말꼬리를 끌었다. 에단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루이의 두꺼운 낯짝을 노려봤다. 드물게 잠을 못 이뤘던 나머지 평소보다도 모든 것이 거슬렸다. 와중에 루이는 불그스름한 게 열이라도 나는 것 같고 술 냄새가 확 풍겼다. 평소에 발갛던 정도와는 달랐다. 에단은 (아무 의도 없이) 목과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목까지 벌겋고 카라는 푹 젖어 있었다. 어깨를 잡자 루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아프지 않은가. 놓게.”
“열이 끔찍한데. 학교는 왜 왔나?” 불덩이 같은 이마에 손을 얹으니 루이가 눈을 질끈 감는 게 보였다.
“…모르겠네. 말 나온 김에 돌아가야겠군.” 그러나 에단은 순순히 비켜주지 않았다. 루이는 불안한 얼굴로 에단의 눈치를 보고 시계를 한 번 내려다 봤다.
“어제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나.”
“……모르겠네.” 루이는 웃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에단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지고 말았다. 무슨 해명이라도 들으면 납득이 될 것 같았지만 점점 더 기분이 더러워지기만 했다. 장난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득한 윗 계급이야 그저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즐겁기만 하여도, 상황은 전혀 게임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가 스포츠라면 최소한 공정해야 했지만, 어떤 룰도 정한 바가 없었음을 에단은 알았다. 그저 욕망하는 바가 일치했을 뿐이다.
“데려다 주지.”
루이는 힘없이 에단의 승용차까지 딸려왔다. 딴에는 저항하는 모양이었지만 열이 너무 끓었다.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우니 루이가 꼭 그의 죄수 같았다. 에단은 액셀을 밟았다.
▩▩▩
루이는 토할 것 같고 무서웠다. 그들은 자기 집 방향도, 그렇다고 병원도 아닌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에단이 자길 죽일 것 같았다. 이 숲에서 암매장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에단의 손을 그렇게 더럽힐 순 없다. ... 에단이 문득 차를 멈춰세우고 운전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루이도 에단을 흘끔흘끔 보았다.
“내려.”
숲 한가운데였다. 루이는 비틀거리면서 땅에 발을 내딛었다. 걷기도 고역이었지만 에단은 부축해주지 않고 루이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루이는 양 발로 땅에 서 있는 데 집중하려 했다.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비처럼 들렸다.
“이제 그만하지.”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그는 어째서 어떤 관계를 그만둔다는 소리를 대단한 선언처럼 할 수 있는가? 무슨 약속도 하물며 계약도 아니었다. 감상적인 사람이나 그런 말에 크게 연연할 테다. 그러나 루이는 아프고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한 관계로 차라리 그 순간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긴 심호흡이 필요했다.
“마지막 키스라도 해 줄까?” 그는 이 말을 대단한 친절을 베풀듯이, 과장해서 꺼낸다. 분명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에단은 단칼에 거절한다.
“사양하지.” 그러나 루이는 기어코 앞으로 나섰다. 에단이 순간 오만상을 구겼다. 몸을 기울이고 얼굴이 가까워질 즈음에 에단은 루이를 확 밀쳤고, 그 바람에 루이는 에단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을 굴렀다. 쿵 소리가 날 정도였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에단이 화를 내는 데 비하면 아무렇지 않았다. 덩달아 넘어진 채로 에단이 몸을 반쯤 일으킨 루이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하지 말라 했지 않나. 사사건건 네놈 맘대로 되는 줄 아나? 루이는 크게 흔들리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손마디에 흙이 잔뜩 묻었다.
“잘 놀다 내치려면 마지막으로 이 정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사람 갖고 장난친 쪽은 네놈이지.”
“그대는 어디 자랑스러운 것처럼 말하는군. 이 몸이 부끄러워 아는 체도 못하면서. 그렇지 않나? 차라리 잘 됐군.” 에단이 이를 바득 갈았다. 루이는 얻어맞지 않도록 천천히 뒤로 기었다.
“협박인가?”
“그럴 일 없네.” 정말이었다. 아무리 증오한들 남에게 죄 같고 부끄러운 일을 낱낱이 밝히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루이는 시선을 떨군다. 에단이 문득 말했다.
“몇 잔이나 마셨나?”
“중요한가?”
“그만 좀 해.”
뭘? 루이가 뻔뻔스레 묻는다. 에단의 굳은 입매가 마치 루이를 평가하듯 가만히 다물렸다. 알지 않냐는 투였다. 루이는 문득 피곤해졌다. 어떤 텐션을 유지하는 것도, 아닌 체하는 일도. 돌아가는 길도 알 수 없는 빌어먹을 숲에서 에단 아스터 버틀러와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는 것도 지겨웠다.
“항상 이럴 거란 걸 그냥 인정할 수는 없겠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에단은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이는 하는수없이 고개를 들어 에단을 올려다봤다. 에단이 말을 이었다. “더… 생산적인 일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비꼬는 건가. 수치스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루이는 시선을 돌리고 주먹을 하얗게 쥐었다. 눈 앞에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에단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루이는 손을 거부하고 혼자 일어나려다 어지럼증에 다시 철퍽 주저앉았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단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루이는 뾰족하게 말하고 싶었다. “여기 데려와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군.”
에단은 잠시 숲을 둘러봤다. “생각 중이다.”
아무래도 머리카락에 흙이 섞인 것 같았다. 루이는 진저리를 치고, 그러나 더 이보다 겉과 속 양면으로 지저분해질 수 있을까 싶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에단에게 밀쳐진 어깨도 욱신거렸다.
뺨에 무언가 닿았다. 에단의 흰 장갑이었다. 루이는 눈물이 흐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마 생리적인 것일 테다. 에단은 루이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한 채 어딘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더니, 다소 흔들리는 듯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는 지도 모르겠는’ 건 뭔가?” 고작 그런 걸 묻기 위해 이 숲까지 왔다면 에단도 조금 이상하다 해도 될 것이다.
“...실수였네.”
“그래,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참으로 그랬다. 루이는 에단이 장갑 낀 손으로 뺨을 문지르도록 내버려 뒀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게 괴롭고 하루하루 사람들을 실망하게만 만드는 것 같다. 루이는 이른바 황금 궁전의 실패작이다. 이토록 너저분하고, 하는 일마다 좋지 않고, 더 나빠질 일밖에 남지 않은 부끄러운 삶……… 그 안에서도 무언가 좋은 것, 이를테면 희망 같은 것을 찾는 게 인간의 본성인가? 그렇지만 차마 입으로 내어 바랄 수는 없다. 만약에 사랑받고 싶다고 한다면 그건 기만일 테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의 마음은 아주 간절히, 간절히 기대하면서 천천히 무너지는 바람에…… 루이는 또 패배하고 만다. 지는 것도 지긋지긋해졌다. 이제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셈이다. 루이는 눈을 감기로 한다. “아니면 어쩔 텐가?”
그리고 긴 침묵이 깔렸다. 숨조차 참게 되는 그런 침묵이었다. 눈물을 닦던 손도 떼어진 지 한참이었다. 루이는 심장이 점점 빨리 뛰는 걸 느꼈다. 벌써 술이 깨는지 무서워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제정신으로 이런 일을 버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면 에단이 조소하는 눈을 하고 있거나 이미 멀리 도망가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한 루이. 왜 말을 꺼낸 거야? 아니,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
에단이 차를 타고 가 버리면 걸어서 왔던 길을 되짚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루이는 조심스레 실눈을 떠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는 그대로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였다. 어렵지 않게 루이는 눈을 마주쳤다. 에단의 이질적인 눈은 그를 뜯어보기보다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루이는 심장이 떨어지고 뱃멀미가 나는 것 같다. 막상 말하고 나니 전보다도 더 이상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체로 보이고 마니까, 그다지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지만. 말하자면 모른체하기 바랐다. 더이상 모른체할 수 없을 때까지.
루이는 땅으로 꺼지기 바라며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에단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앗 하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키스라기보단 눌렀다 떼는 정도였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는 사이에 에단은 엷게 눈을 뜨고는 다시 입맞춰 왔다. 어떻게 한 쪽은 저렇게 까맣고 다른 한 쪽은 호박처럼 밝지. 루이는 급기야 엉뚱한 생각을 해 버린다. 그가 얼어 있는 사이 에단은 두 번이나 더 간을 보듯 키스했고, 점점 닿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에단이니만큼 조금 흥분되긴 하지만) 그보다 더 간질간질했다. 깃털베개 백 개가 터진 것처럼.
루이는 횡설수설했다. 난 그냥 안 되네. 다른 사람처럼 사는 게 안 돼. 자격이 없는 것도 알아. 그대 눈에도 그냥 주정뱅이겠지. 그런데 그냥. 말이 나왔을 뿐이네.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그대만 시간낭비하게 만들었군. “알았다.” 마침내 에단이 한 마디 했다. 루이는 혀끝에서 감기맛이 났다. 에단의 어깨에 미끄러지듯 머리를 올리니 밀쳐내지는 않았다.
▩▩▩
어깨 위의 루이는 뜨끈뜨끈했다. 에단은 느리게 그의 팔 밑을 받혔다. “우리 좋은 건가?” 루이는 지금 꼭 그 말을 해야겠다는듯 어깨 위에서 웅얼거렸다. 그래. 에단은 작게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가까우니 들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굳이 추궁하면서까지 확신을 얻을 이유가 없었다. 에단이 확인하고 싶었던 건… … 그만 돌아 버릴 것 같은 이유들은, 그를 안고 있으니 별 것 아닌 것 같았다. “춥군.” 루이가 문득 칭얼거렸다. 에단은 이안이 앓던 일을 떠올리고,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이런 ‘왕족’들은, 어떻게 이토록 솔직하게 관심을 바라는 건가? 에단에겐 유치하고 무능해 보이는 상황을 굳이 무릅쓰는 걸까?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믿는 걸까? 나를? 그는 참으로 몇 년만에, 이안을 떠올리고도 전혀 자책하지 않는다. 머뭇거리다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으니 루이가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느낌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좋았다. 루이는 거의 그랬다. 분명 인간인데 에단에게만 너무 완벽해서 정말이지 기이할 지경이다.
에단은 천천히 말을 꺼낸다. 아는 의사가 있다고. 실은 이안이 죽고 나서 자신이 추천받은 의사였다. 나아지려고 한다면 찾았으면 좋겠다. 아니, 나아졌으면 좋겠다. 어떤 구렁텅이에 있더라도 가끔 웃고 걷고 노래하고, 내키면 에단과 뒹굴거나,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약속할 수 없더라도 기억하길 바랐다. 검은 진흙 속에서 에단은 루이를 한참이나 안고 있었다. 죄라면 오랫동안 들키지 않길 바라면서.
끊을까 하다 한 번에 올림. 미국 배경을 상정하고 썼다. 인소감성 낭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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