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는 퇴근 전 남은 서류를 내려놓고 어깨를 쭉 펴 기지개를 켰다. 주별 정화 계획 따위의, 그날 확인해야 할 서류는 대강 기입했으나 매니저의 일이란 프로젝트처럼 하나를 해치운다 해서 다 없어지는 류의 작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엘이나 유세프가 도와줄 일은 솔선수범하고 있고,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매니저는 믿어 본다. 방문에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역시, 퇴근 직전에 한 명쯤은 나타나 줘야 우리 사신들 아니겠어. 매니저는 기묘한 반가움…과 함께 들어오라고 목소리를 내어 본다. 노크를 할 만한 사신은 몇으로 추릴 수 있는데(얼마 전에 생존법칙 445번으로 노크법을 알려준 키르도 포함된다. 그는 어떤 리듬에 꽂혔는지 자기만의 박자가 있었다. 세 번, 그리고 한 번.) 문을 연 것은 에단이었다.

“실례합니다.”

으응, 아냐. 들어와서 앉아. 매니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신들을 보는 건 그다지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야말로 매니저 일에 적임자라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커피포트에 남은 커피를 내어 주니 에단이 감사를 표했다. “미안, 약간 식어서.” 점심즈음 내렸으니 아마 뜨겁진 않을 테다. 느린 동작으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에단은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매니저의 책상 모서리에 시선을 두었다. 드문 일이다.

 

매니저는 에단이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지 대강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대체 어떤 요구(내지는 평가)를 꺼낼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건 에단이 어느 정도 자존심을 내려놓았는지에 달려 있었다. 게다가 사신들은 가끔, 정말 예상치도 못한 기상천외한 생각들을 해댔다. 사람 속은 정말 알기 어려워. 매니저는 에단의 침묵을 따라 침착한 태도로 몸을 기울였다.

“저에게 최근 ‘미미한’ 불면증 증상이 있다는 건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예상대로.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에단이 고생일텐데 굳이 사과 않아도 돼. 요즘은…

“저에게 명령하십시오.”

“으응?”

“…무릎베개를 하지 말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아니면 제 룸메이트에게 부탁드립니다.”

예? 뭐라고요? 뭘 명령해? ………

………………………

매니저는 필사적으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양 손을 포개었다. 진짜로? 에단 아스터 버틀러. 진짜로?

 

 

 

 

 

에단의 소위 ‘미미한’ 불면증은 실제로 심각한 수준으로, 매니저는 지난 상담 이후 의사 왕진을 부탁했었다. 그는 에단을 간단하게 진찰하고 다음 약속까지 임시로 내복약과 커다랗고 푸른 조명을 처방해 주었는데, 도움이 되는지는 직접 듣지 못했지만 주위 사신들의 말에 따르면 증상이 그다지 완화되는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원인이 무엇인지도 뚜렷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정 건강에 무리가 가면 에단이 임시로 독방을 쓰게 조치할까 고민했지만, 본인의 의사도 있으니 낮조 동료들과 있는 편이 나을 거라는 결론에 닿았다. 그 때까지 에단은 며칠간이나 한 숨도 자지 않고 새벽 사신지부를 유령처럼 순찰하거나 훈련하거나 했다.

 

“그전엔, …잠투정과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덟 시간씩 꼬박꼬박 잤거든요. 저희 중에선 가장 취침 시간을 잘 지켰어요.” 테오가 그랬다. 종내에 에단은 온 흰자가 벌겋고 손등이며 핏줄이 도드라진데다 쳐다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낯빛이 재색이었다. “진짜, 어? 얼굴이 캄캄하다고! 나 저녁에 보고 소리지른 적도 있어!” 하는 카티의 증언을 추가한다.

와중에도 행동은 충격적으로 절도 있어서, 마치 기사도란 개념을 누군가 죽음에서 좀비화하여 부활시키면 그런 꼴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에단이 남은 기력을 촛불처럼 불태우며 손끝까지의 자기 세포 하나하나를 죽을 힘을 다해 제어하고 있는 양으로, 언제 삭은 뼈처럼 와르르 무너질지 몰랐다. 매니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매일 대단히 걱정하던 차였다.

그러다 얼마 전 해결, 비슷한 게 된 것 같다…는 희소식을 건너들었건만…… 매니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에단과 시선을 마주했다.

“일단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

에단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다. 내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아직 불면의 피로가 뚝뚝 떨어져 보였다. 바로 해결되지 않아 서운할지 모르겠으나 매니저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니, 일단 그런 황당한 명령을 누가 내려요? 제가 명령 내릴 짬밥인가요?

“…루이가 들이대는 거라면, 그냥 거절할 수도 있잖아? 그분이 좀… 그렇긴 하지.” 에단이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켜는 게 보였다.

“효과가 너무 좋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매니저의 머릿속에는 혼돈이 뭉게구름처럼 증식되어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매니저님께 이런 하잘것없고 사적인 요구를 말씀드려 염치없습니다만, …이전에 곤란한 일을 말하라 하셨던 게 떠올랐습니다.”

“내가 그랬긴 하지.” 이런 일로 엎지른 말을 취소할 이유도 없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신들을 아끼고 별 일 없길 바랐다.

“그래서 매니저님께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무릎베개가… 그렇게 싫어?”

에단은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명분이 필요합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추종자들이여, 이렇게 모여준 건 좋네만, 그대들에게 베풀 내 무릎은 한 쌍뿐이라 아쉽구나. 느핫핫핫!”

그런 게 아니라고. 매니저는 이미 설명한 걸 또 말해 봤자 그다지 요점을 전달하지 못할 것 같아 그저 마주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본래 루이만 불렀는데 왜 구경꾼이 이렇게 몰린 거야?

“진짜 궁금했거든요. 듣긴 했지만.” 나인이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낮조의 밝은 거실은 사신들이 제각기 흩어져 있어도 공간이 남았다. 사신들은 왁자하게 굴지 않고 저마다 가볍게 수군거렸다. 매니저는 머리가 갑자기 띵했다. 나만 빼고 이 무릎베개 사건을 다 아는 거야? …그냥 무릎베개 아냐? 보기 좀 민망하지 않을까?

“에단은 그냥 ‘효과가 너무 좋다’고만 했는데.”

“그렇게 설명하기엔…” 테오가 입을 열고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아니, 이따 보시면 되겠어요.”

이 상황이 가장 수치스러울 게 분명한 에단은 그러나 차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불면의 날이 너무 오래되어 슬슬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매니저를 납득시킬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었다. 딴에는 대단한 결심일 테다.

고작 무릎베개를 금지하라고 명령받기 위해서라면 꽤 수고로운 일이었다. 매니저는 에단에게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려고 했다. 에단은 눈을 감은 채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곧 루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루이는 방글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왕자에게 맡겨.” 산뜻한 캐치프레이즈다.

“닥쳐.” 에단은 매섭게 대꾸하고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루이의 무릎에다가 머리를 대었다. 매니저는 대놓고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도 실례 같아 잠깐씩 흘깃거리기로 했다. (그런 예의가 없는 사신도 많았지만)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데 잠들기란 불면증이 없더라도 어려운 일 아닌가? 갓난아기나 가능할 테다.

 

 

 

 

 

 

“와, 대단하다.” 주위를 둘러싼 정적 가운데 누군가 가만히 속삭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죽은 거 아냐?

“왕자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 뒷목이라도 후려쳤어? 데이, 넌 봤냐?” “아닝.”

“에단이 얌전히 뒷목 맞고 있을 성격인가?”

“몰래 독을 탔다던가.”

“멀쩡한 사람 자꾸 죽이지 말아요. 숨 쉬고 있구만.”

점점 소란이 커지자 루이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쉿’ 했다. 묘하게 어울리는듯,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몸짓이었다. “기껏 잠들었는데 방해하면 못 쓰지. 그대들은 다음을 기약하고 이만 그를 잠의 축복 속에 두는 것은 어떠한가?”

사신들은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그 말대로 구경을 멈추고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키르만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을 뿐이다. 매니저는 충격 어린 얼굴로, 찰나의 순간 코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듯 축 실신하던 모습을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에단. 너무… 오래 못 자서 그냥 아무데나 머리를 대면 잘 수 있던 것 아녔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의학적 소견이 불면증이라 나올 이유가 없다.) 에단은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어떤 걱정도 없는 평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확실히 어딘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잘 자는 사람도 저렇게 맥이 끊어지듯 잠들진 않을 텐데,(그것도 테오의 반응에 따르면 매번 루이가 무릎베개할 때마다 이랬던 것 같다.) 아무튼 기왕 잠든 것, 에단을 도로 깨워서 말을 걸 순 없는 노릇이니 매니저는 지나가는 엘을 불러 세웠다.

“저런 기적도 있어?” 엘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럴… 리가요? 확실히 신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시구가 있긴 하지만… 공격해서 기절시키지 않는 다음에야? 또 기적이 일어났다면 제가 알았을 거예요. 대천사님들이라면 알지 몰라도, 저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양들은 노래를 불러 주면 곧잘 잠들죠. 제이미가 말했다.

하지만 천사의 기적이 아니라 할 지라도, 마치 거대한 신비나 이적을 목도한 것 같은 기운이 주위를 감쌌다. 그건… 진정한 축복이었다! 누구든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 적이 있다면 이해할 것이다. 잠들고 싶지 않았을지도,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잠들어야지만 기능할 수 있는 약한 인간의 성질은 오랜 불면을 감당할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면 그만 죽어 버릴 수도 있다. 누적되어 머리를 서서히 짓눌러 오는 피로감, 뒤틀리는 내장, 마치 뇌가 저절로 부풀어올라 다른 기능을 마비시키는 양… 몸을 가눌 수 없고 일 분 일 초가 고통스러운 불면의 저주 속에서, 루이의 허벅지는 마치 신성한 권능처럼, 그것도 전혀 내켜하지 않는 사람조차 순식간에 잠으로 인도한 것이다.

신선한 재능이네. 그것도 루이 왕자가. 노아가 퍽 호의적인 감상을 뱉는 옆에서 매니저는 고민에 빠진다.

“왜 하지 말라고 명령하라 했는지 알 것 같아.”

“합리적으로 에단이 현재 선택할 수 있는 병증의 해결책 중에 가장 뛰어나고 효과적이지.” 시릴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렇지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에단은 그렇게 말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불빛이 희미하게 길쭉한 창 밖으로 비치는 오랜 기억 속의 궁전 바깥, 차가운 밤하늘 바람을 받아 둥둥 떠 있는 꿈을 꾸었다. 높은 곳에서 본 성은 아름답고 적막해 보였다. 그리고 미처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빛깔과 소리를 거쳐…… 에단은 물 속에서 천천히 일어나듯 눈을 뜬다. 인간이 죽음 같은 잠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루이는 가만히 에단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주고 있었다. “작은 기사여, 잘 잤나?” 에단은 즉시 닿아선 안될 것에 닿은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마나 흘렀지.”

“한, 두세 시간? 얼마 안 되었네.” 루이는 시계를 넘겨다보는듯 고개를 꺾었다.

에단은 체중에 눌려 구겨진 옷매무새를 빠르게 정리했다. 간만에 머리가 맑으니 살아있는 감각이 생생했지만 지금만큼은 무시하려 해 본다.

 

“아까가 마지막이었겠지?” 루이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

“못 들은 셈 칠 테니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되네.” 이 몸은 언제나 사랑하는 추종자에게 열려 있는 문과 같으니, 느하핫! 따위의 뒷말이 이어졌다. 에단은 본체만체할 작정으로 루이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아닌 듯해도 무슨 약점을 잡힌 것 같고, 에단은 특히 루이가 약한 부분을 제어하는 게 싫다. 루이를 하루 종일 찬양한다던가, 칭찬한다던가, 비위를 맞춰 시중드는 일은 사양이다. 바라는 대로 좋아하게까지 되면 루이가 딱 원하는 일일 테다.

 

 

 

 

 

에단이 그 뒤에 매니저를 찾아갔을 때는 키르도 함께였다. 매니저는 막 얘기를 시작하려 했는지 에단을 보고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어, 안녕. 일어났네?

“제가 방해했습니까?” 아니다. 아무 말도 않았다. 키르가 대신 대답했다. 매니저는 키르에게 양해를 구하고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좀 괜찮아?” 상냥함이 전해지는 어투에, 에단은 적당히 대답했다. 걱정하는 대상이 되는 일은 익숙지 않고 이따금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만은 어떤 신경이 약해지곤 했다. 아까 일 말인데.

“…거절하셔도 이해합니다. 제가 미숙한 탓에 무리한 요구를 했군요.”

“아냐. 왜 그랬는지 알겠는데….” 매니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그…, 너도 알겠지만, 효과가 좋다는 게…”

“…딱히 연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에단으로선 그런 걸 연기하느니 차라리 물구나무선 채 당번을 도는 게 나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매니저가 무심코 중얼거렸고 에단으로선 딱히 그녀의 의문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제일 궁금하던 차였다. 루이 왕자는 무슨 마법을 부리기에 사람을 자기 무릎 위에서 일시에 의식불명으로 뻗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마법이라도 걸린 허벅지인가? 그다지 대단치 않고 쓸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된 관계로, 사람이 굳이 배우길 선택하고 싶은 재능은 아니겠다. 턱을 괴고 골똘히 고민하던 매니저가 문득 말을 꺼냈다.

“혹시 둘이 사…” 에단의 입꼬리가 심상찮게 꿈틀거리는 걸 본 그녀는 황급히 말을 멈춘다. 사…사…생활을 공유해서 같이 있으면 편하다던가. 전혀. 아닙니다.” 어금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렇구나. 그래. 무슨 간섭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매니저는 빠르게 이 난감함을 벗어나기 위해 긴 웃음을 흘렸다.

 

 

 

 

“그것 말인데.” 가만히 듣고 있던 키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본 적 있다. 그 때문에 얘기하려 한 거다.” 그는 에단을 흘깃 본다.

우리 부족에 점쟁이가 있다. 날씨를 알아맞추거나 기원을 하거나 옛날 노래를 부르는데, 마술도 몇 개 할 줄 안다. 점쟁이는 긴 싸움을 겪거나 누군가를 잃은 자에게 마술을 걸곤 했다. 충분히 쉬지 않은 전사는 살해당하니까. 루이가 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우선 어떤 ‘단어’를 말하는데……

키르는 어떤 동작이나 표정에 대해 설명하지만 굉장히 은근하고 세밀한 움직임이라, 듣고 바로 연상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 설계는 보통 사람들이 알아채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키르 말대로라면 루이는…” 최면을 걸었군. 에단이 말을 끝맺었다.

“’최면’이란 게 내가 말한 것과 같다면, 그렇다. 나쁜 건 아니다. 해로운 마술이었다면 즉시 저지했을 것이다. 그저 자다 일어난 것뿐이지 않나.” 키르가 차분하게 답했고, 각자 생각에 빠지느라 방은 침묵에 잠겼다.

 

 

“에단.”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루이의 도움을 받으면 잠들기 쉽단 걸 우리 모두 알지. 그렇지만… 하기 껄끄러운 일까지 해가면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그게 에단을 더 괴롭게 하는 것 같네. 그렇지만 건강에는 유의해야 해. 참지 말아줘. 최대한 빨리 치료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매니저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명령’…해 줄까?”

“괜찮습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단은 의외로 깨끗하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방문이 달칵 닫힐 때까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게 해결인 걸까? 딱히 아무 것도 바뀐 일은 없었는데도. 어떻게 루이의 무릎 위에서 그렇게 손쉽게 잠들 수 있었는지의 의문만이 풀린 셈이다. 그러니까, 그다지 그들이 특별히 친해서라거나 뭔가 대단한 기적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단순한 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매니저는 에단의 속내를 짐작해 보려다 포기했다.

 

 

 

 

 

며칠 뒤에 매니저는 바깥 정원을 돌다 벤치에 앉아 잠든 에단과 루이를 마주쳤다. 루이는 독서 중이었는지 얇은 책을 들고 눈을 접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니저는 다시 한 번 허벅지를 베고 세상 모르게 잠든 에단을 신기하게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최면술이라 이거지…. 루이가 그런 걸 알고 있는 줄도 몰랐네. 매니저가 거의 졸도한 에단을 쳐다보건 말건 루이는 ‘내가 뭘 했는데? 간단한 최면?’ 하고 말하는 듯한, 무고하고 우아한 얼굴로 편안한 정자세를 취했다.

그래, 뭐, 나름대로 위하는 일이라 이거지. 누구는 그렇게 싫어했는데. 왠지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무슨 꿈을 꿨나?”

에단은 반쯤 눈을 뜬 상태로 “돼지 꿈.” 중얼거렸다. 루이는 무엇이 우스운지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나나?

양 쪽 색이 다른 눈이 루이를 올려다본다. “……아니.”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단은 이제 이유 없이 화난 것 같지도 않고, 어딘지 체념한 듯도 했다. 에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굳은 몸을 펼 동안 루이는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았다. 루이가 이따금 자는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던 것처럼 에단도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다. 자는 사람은 반응도 감상도 없어 어떤 표정을 지어도 상관없는데, 깨어 있는 사람이 싫어하지 않게 하기는 어려웠다.

“보석이 있다면 바라보고 싶은 게 당연하겠지.” 물론 루이에게선 우스꽝스러운 말만 나올 따름이다.

“바로 들어가지 않나?”

날이 쌀쌀했다. 루이는 다른 곳을 쳐다보기로 한다. “…다리가 저려서.”

 

에단이 대답한다. 조금도 못 움직이나? 이상한 요구다. 굳이 넘어질 일을 각오하고 일어나고 싶진 않았다. 루이가 고개를 젓자 에단은 루이 앞까지 걸어왔다. 루이에게는 그다지 변함없는 무표정만이 보였다. 에단이 느리게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등과 허리즈음을 붙든다. 지금 뭘 하려고… 대뜸 일으켜 세워지는 바람에 루이는 저린 다리를 가누질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땅으로 돌진하는 대신 앞에 선 이에게 안긴 게 달랐다.

루이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일은 드문데 이 상황에서 갑작스레 할 말을 찾기는 극도로 어려웠다. 그렇다고 행성에 대한 얘기나 지렁이에 대한 얘길 할 순 없는데, 마치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솟구쳤다가 원을 그리며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가슴부터 어깨까지가 바스락거리며 바싹 붙었다. 에단은 그들이 포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체하듯 루이를 땅에서 이 센티미터 정도 들고 있다. 루이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에단의 판판한 등 뒤를 꽉 잡았다. 그의 망토가 손 안에서 잔뜩 구겨졌다.

“그게.”

겨우 입을 떼어 봤지만, 그 거리라면 아무래도 틀렸다. 이젠 끝이다. 귀끝까지 심장이 쾅쾅 울렸다. 좋아서 죽을 것 같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정해진 자세가 아니면 최면을 걸 수도 없다. 식은땀을 흘리며 루이는 얼어붙었다.

“이대로 걸을 수도 있다.” 에단이 바로 가까이에서 말을 걸었다.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어딘지 편안해 보이는 어투다.

“……괜찮네.”

“그래.”

그렇게 둘은 저린 다리가 풀릴 때까지 오 분이나 끌어안고 있다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방으로 돌아왔다. 에단의 불면증은 수 개월에 걸쳐 서서히 나아졌는데, 그러고 나서도 가끔 루이의 무릎을 베고 잠들기도 했다. 순전히 그러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코미디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간부터 방향을 잃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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