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상해.
표기는 일단 에단루이이지만...? 약한 편입니다. 매니저 비중 큼.
추천 BGM: 나랑 아니면 - 검정치마
아무렇지 않게 넌 내게 말했지
날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00.
“안녕, 그대.”
에단은 하마터면 입에 들어갈 뻔한 장미 꽃잎을 확 쳐내고 눈만 간신히 떴다. 얼마나 거기 있었던 건지 루이가 눈을 접고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하루하루 새롭게 미친 경지를 갱신하는군. 그러나 말하기 위해 기력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 깨고 나면 다시 잠들기 어려워(햇빛조차 재촉하듯 얼굴에 부드러운 빛을 쬐어댔다.) 에단은 결국 루이에게 등을 보인 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사위가 유난히 조용했음을 에단은 뒤늦게 깨달았다. 다른 사신이라도 괴롭히러 갔는지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져 보니 루이는 아직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바깥에서 준이 훈련하는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에단은 빳빳한 제복 깃을 매만지며 내키잖게 한 마디 던졌다.
“꾸물대지 마라.”
“으응?”
루이에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선이 딱 마주쳤다. 거울이라도 보는가 했더니, 이상 성욕인 쪽이 더 기분 나쁘다. 에단은 잠시 자기 얼굴에 무언가 묻었는지 궁금해졌다가, 분명 이상한 장난질일 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게다가 이미 기이가 써먹은 바 있다. 생각할수록 불쾌하기 그지없다.)
“뭘 보는 거지?”
“그저, 신기해서 말일세….” 마주 노려보자 루이는 어설프게 시선을 피하더니 “금방 가겠네.” 했다.
01.
“그러고 보면 정말 조용하긴 하지요.” 갑자기 나인이 말했다. 준은 혹시 루이가 제대로 못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했고(그러나 그의 기준에 따르면 키르를 뺀 사신 전원, 매니저까지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베린은 “좋지 않나? 시끄러운 사람 하나 줄어서.” 하고는 시끄럽다는 뜻이 뭐냐고 왁왁거리는 퀸시에게 쫓겨 사라졌다. 테오는 고개를 기울였다. 많은 이가 루이를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로 감동의 도가니에 빠질 게 분명하므로(더불어 그날 일을 모두 서정시를 읊느라 생략할 터다) 다들 뒤에서만 수군거리고 있지만, 아무튼간 루이는 평소와 달랐다. 어떻다고 해야 할까, 우울하기보다는 좀더… 사신 일에 전념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좀더 타의 모범적으로 변하는 일환 아니겠는가? 그러나 테오의 주변을 봐도 사람은 대부분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본래 갖고 있는 색이 오래 둔 물감처럼, 질릴 정도로 굳어져 버린다. 이를테면 얼굴에 한이 덕지덕지 붙은 자. 원혼들… 내가 한 번 얘기해 볼까? 하는 매니저를 말리느라 테오는 본인이 나서겠다는 말을 해 버렸다. 어째서 매니저님은 그렇게 모두에게 공정하려 들고… 그녀가 무슨 복지사인가? 가라앉는 기분은 준이 등장하면서 조금 산만해진다.
“루이 형님의 기운을 나게 해 드리는 겁니다!”
“기운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나 문제가 있다면 루이는 털끝만치도 진지한 얘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읊는 시가 개중에 가장 진지했다.) 왕자는 분위기파악을 하기엔 스스로에게 너무 취해 있는 탓에, 용케 어르고 달래는 매니저가 신기할 정도다. 돌아가며 쓰는 거실 청소 이야기를 할 때도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상상하고 테오는 진저리를 친다. (결국 반절 이상은 테오가 해치우고 있다.) 툭하면 장미를 뿌려 대는 통에 집중하기도 매우 어렵다. 준과 액션영화 이야기로 흥분하지 않고 5분 이상 이야기하는 수준의 난이도 아닌가.
그 날의 원혼 정화는 둘씩 흩어지기로 합의가 되어 테오는 루이를 따라 나섰다. 특별히 까다롭진 않았으나 수가 자잘하고 각각 먼 곳에 흩어져 있어 키르라면 곧잘 해치웠을 법한 임무였다. 루이가 장미를 던지는 궤도는 (산탄총과 비슷했지만) 매번 압도적인 위력으로 명중했고 그들은 수월하게 버려진 공사장을 헤치고 나아갔다. 테오는 특히 더러운 액체가 묻은 곳을 주의 깊게 피해 갔다.
“나비, 만화경에 안 넣으시나요.”
루이는 “아아, 그대가 거의 다 하지 않았는가? 이 몸은 다 챙겼네.”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나비를 바깥에 오래 두어 좋을 것도 없으므로 테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만화경을 열고는 빛나는 무리를 한데 모았다.
실적을 더 쌓으려는 줄 알았는데 말예요. 안개 같은 기운 사이에서 원혼들이 ‘억울해.’ ‘후회해.’ 그들에게 속삭였다. 루이의 눈은 여전한 심록빛을 띄고 무채와 같은 공간을 잘 아는 듯이 훑었다. 맞아. 얼마 전에 상기했지. “청월제 말이죠.” 그대는 어떤 소원을 빌었나.
‘나는 그런 소원을 빌고 싶어.’ 갑자기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이 안개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눈구멍은 텅 비고 위아래로 길쭉했다. 테오는 즉시 한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별빛이 섬광처럼 일어났다. 대체 어디에서,
“왕자에게 말해 보게.” 테오는 루이가 장미를 들었지만 선물하기 전 뜸을 들이듯 뒤로 살며시 빼는 모습을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원혼은 텅 빈 얼굴을 뱅글 돌려 입이 위로 가게 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게, 그게 말이지. 뭐였더라? 뭔가 간절히 바랐는데. 소원을 빌고 싶었는데. 허공에 뜬 얼굴은 중얼거렸다. 그의 몸통은 텅 비어 있었다. 모르겠네.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여기… 여기 있었는데. 뜨거웠어. 나는.
“…이루지 못한 게 있었나요?” 테오는 그가 자신들을 해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손을 내렸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나?” 루이도 한 마디 했다. 달걀 같은 원혼은 뻥 뚫린 눈구멍으로 하늘을 봤다. 난… 살고 싶었나 봐.
그 때 루이가 장미를 들었고 테오에겐 갑자기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장미 가지가 슬퍼 보이는 얼굴의 모가지를 이만 꺾듯이 사선으로 치솟고… 그 꼴을 덮는 생생한 꽃잎이 우수수 날렸다. 꼭 비 내리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테오가 퍼뜩 한 발 뒷걸음질치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루이가 어깨 위의 나비를 테오 쪽으로 날렸다.
“그렇다는군.”
“지저분하네요.”
“꽃잎이 상할 때만 그렇지.”
테오는 대체로 살아있는 것들이 어느정도 더럽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대신에 운을 띄우기로 했다.
“요즘 이상하시던데.” 매니저가 이럴 때 어떻게 하는지 상상하려 했지만 상상하던 것보다 더 차가운 어투가 나왔다. “이 몸이?” 루이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안개가 점차 없어지고 있었다. 둘은 굳이 합의할 것도 없이 왔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한참 침묵이 흘렀다. 좋아, 정말 이상한데. 테오는 생각했다. (왕자를 이리 걱정하다니, 참으로 훌륭한 추종자로다 … 따위를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매니저가 그러던가?”
집결지에 거의 다 왔을 때에 루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테오는 움찔했다. “그렇다면요.”
“과연…. 모르는 게 없군 그래.”
당연하지. 매니저님이 얼마나 신경써 주시는데. 테오는 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지만 그게 다였다. 도착하니 준이 어떻게 되었냐고 (거의 다 들리게) 속닥였다. 루이는 시안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히죽거리며 보고 있었다. 테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르겠네.’ 대답했다.
02.
그런 소문이 퍼졌다. 14지부 중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다들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냐고 되물으면, 그게 아니라, 한 번도 육신을 가져본 적 없는—이른바 기계라는 것이다. “냥선배 아냐?” 노아가 준 감자칩을 씹으며 시안이 말했다. “그 짧뚱한 외관으로 그렇게 복잡한 발음을 어떻게 해? 그리고, 가끔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 같애. 기계인듯.” 넌 마계 와본 적 없지? 퀸시가 이죽였다. 유세프가 말 조심하라며 주의를 주는 사이 모리가 새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며 중얼거렸다. 리히트가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다.
“자기이가 기계라면 슬플 거야.”
“제가요? 후후후, 어떨지. 이미 녹슬고 낡아빠져 멈춘 것이나 다름없겠군요.”
시안은 주제에 재미를 붙였는지 자꾸 누가 기계인 것 같은지 재촉해 댔다. “설정으로 따지면… 제이미.” 곤란한 표정의 유세프가 결국 아무 말이나 내뱉었고, “내가 왜요?” 하는 느리지만 위협적인 대꾸가 당장에 날아왔다.
“힘이 기계적이야.”
“납득했다.”
03.
루이는 오래된 영화를 빌려 오더니 하나씩 시청하기 시작했다. 어떤 건 흑백이고,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데 사람들이 춤추는 모양으로 음악을 짐작하기도 했다. 꼭 자기 방에서 틀었으므로 에단에게도 하는 수 없이 보였다. 장르는 몸서리칠 정도로 달콤한 로맨스거나 어딘지 슬픈 멜로이거나 둘 다이거나 했다. 루이가 훌쩍이면 휴지를 갖다 줬다. (가만 두면 침대를 버리기 때문이다.) 깜빡 자다 깨었는데 영화가 계속되던 적도 있었다. TV 소리 같은 것이 웅얼거리듯 들렸다. 에단은 가운만 걸친 등에 대고 말한다. 이만 끄고 자는 게 좋을 텐데. 루이는 살짝 몸을 돌리고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고 싶지 않아서.”
왜. 에단은 분홍 조명이 비추는 루이의 옆얼굴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루이는 캄캄한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 밑이 조금 퀭했다. 자면 죽은 백성들의 얼굴이 떠오르네.
에단은 입을 다물고, … 그다지 해줄 말이 없어 돌아누웠다. 흰 벽을 쳐다보고 있자니 뒤에서 작은 음악 소리가 낮은 소음으로 귀에 닿았다. 가끔 죽는 날의 꿈을 꿀 때가 있었다. 아주, 아주 고통스러웠지만 에단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피부껍질에서부터 뱃속까지 산산이 조각날 것처럼 꿈틀거린다. 어쩌면 그 날은 기사로서 영예로운 순간이기도 했다…… 다만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분할 따름이었다. 평생을 지키기로 약속했건만… 나의 왕이여.
그는 눈을 감고 한참을 잠들려 애쓰다 결국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루이는 미동도 없이 스크린을 보고 있다가 에단이 툭툭 치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같이 보는 건. 에단은 그 말을 꺼내기가 왜 그렇게 힘든지 고민한다. 아마도 이 하찮은 왕자는 마이페이스가 너무 심하고, 어떻게든 상대를 말려들게 해서 그럴 것이다. 누구든 자길 좋아하게 만들려고 안달이 나서. 에단은 조금도 그럴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루이가 슬금슬금 침대 위에 공간을 만들고,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스크린을 함께 보게 되었다.
“…저 남자가 죽은 옛 남편일세.” 루이가 낮은 소리로 앞 내용을 일러주었다. 에단은 은은하게 풍기는 코롱 냄새를 맡으며 새벽을 헤었다.
02-2.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다. 누군가가 기계라고 단정짓기에 14지부의 정화율은 참… 낮았다……. “아니, 기계라면 효율이 좋아야 할 것 아냐?” 사이보그라기엔 다들 점수가 너무 인간적이시네~ 퀸시가 빈정거리고 노아가 조용히 거기 너는 포함 안 되지? 덧붙였다.
“당연한 거 아냐?”
“공동 책임인데 왜 너는 안 들어가? 말도 안 돼.” 베린이 쏘아붙이고 엘은 웃는 얼굴로 말리다 연달아 재채기를 시작했다. 기계가 누구든 꼭 대련을 해보고 싶군요! 준은 한편 기이한 열망을 불태우고 있다.
있지 않아? 우리 중에 일 잘 하는 사람. 유세프가 태평하게 말하고 모두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기계라 함은 본래 프로그래밍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 사신의 존재 이유가 원혼의 정화라 치면 다들 기계 탈락이었다. 이 건물 안에서 자기 목적에 가장 충실한 사람, 자신과 타인을 보살피며 공동 책임에 기여하는 사람……
“매니저?”
테오가 대번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건 나쁘지 않죠.” 모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구상해 봤습니다. 사신 및 스탭 대상 튜링 테스트!” 시릴 님이 ‘다소’ 도와 주셨죠. 작게 덧붙인 뒷말은 거의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야, 걔는 본인이 제일 테스트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냐? 사악한 과학자가 로봇에 뒷맛 나쁜 성격을 부여하면 그렇게 될 것 같던데. 하는 투덜거림은 시릴의 헛기침 소리에 묻혔다. 물론 나의 명석한 두뇌가 기계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인간 고유의 동시다발적이며 다중적 맥락을 포함한 사고는…… (불행히 그 뒤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누나도 소원이 있잖아. 소원이 있어서 열심히 하는 거야, 우리처럼.” 카티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입력될 수 있는 부분이지. 어떤 기억을 가졌다고 믿는 건 쉬워. 그러면 자기에게는 진실이 되지. 인간들도 없는 기억을 있다고 착각하는걸.”
명계 인간이 굳이 특별 취급으로 사신들과 같이 지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전투 능력도 만화경도 없는데? 우리 사신들이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을 열기 쉬우니까, 그런 역할인 거지. 그러면 매니저가 ‘있다고 착각하는’ 소원은 어떻게 되는 거야? 영영 이룰 수가 없는 거야? 하지만 그녀의 목적에는 충실할 수 있겠지. 기계니까.
“헛소리하지 마세요.” 테오가 차갑게 무리에게 일갈해 대화는 멈췄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다. 굳이 누굴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사신들이 대강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는… 마스터가 사이보그여도 좋을 것 같은데요. 후후후.” 와중에 기이는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그래도 좋은걸요.” 엘도 어쩐지 고개를 끄덕였다.
04.
파리의 어느 강변이 화면에 잔잔히 비쳤다. 지루하고 느려터진 영화였다. 루이의 눈에 보름달이 일렁였다. 에단은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 알게 됐네.”
에단은 그가 무슨 얘길 하려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매니저 얘기인가. 천한 것들이 지어낸 얘기, 신경 쓰는 게 한심하다.”
“아니, 나는…”
“벌써 테오와 준에게도 말해 뒀다.”
루이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난… 알아. 직접 봤네. 그가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장미향이 훅 풍겼다. 루이의 눈빛은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단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영화 인물의 말소리가 쉿쉿대고 화면이 암전된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루이의 얼굴이 희게 그려졌다. 에단은 차갑게 물었다. 어떻게, 언제.
청월제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서. 루이는 주저하는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다. 그저 소문일 때도 황당했지만, 정말로?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녀의 모든 말들이, 행동이. 그게 어떻게 기계의 것일 수 있지? 모두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도록,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게 해 놓고. 그건 마치… 기만이다. 누가 이 모든 계획을 만들었던지. 새빨간 기만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럼 매니저는… 자신도 전혀 모르는 걸까?
루이의 눈은 정말 진실되어 보였다. 에단은 강하게, 무언가 착각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지나치게 흔들리는 것 같아 천천히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이는 달을 담은 호수마냥 일렁이는 눈을 하고 에단을 바라보았다. “내가 본 게 진실이 아니길 바라네. 기억의 검이 다시 나타난다면… 그것부터 빌고 싶어.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어서…….”
“마음을 굳게 해라.” 에단은 낮게 대꾸했다. 루이가 단단한 팔꿈치에 걸린 소맷자락을 조심스레 잡았다. “하지만 이 몸은…” “무슨 상관인가? 본질에 집중하는 게 나아. 본래는 어땠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모두를 사랑하는 것처럼. 루이는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에단은 잠시 침묵하고, “안다.” 했다.
루이가 입을 맞춰온 건 아마 충동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극한 혼란과 두려움 속에 어떤 도피처를 찾는 행위. 어떤 짓을 해도 잡아줄 팔이 있음을 확신하려는 듯이. 그 결과로 모든 것이 아무리 망가진대도. 에단의 뺨이 축축해졌다. 타인의 눈물 때문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루이가 마지막으로 속삭였고 에단은 그게 입맞춤의 이야기인지 먼저 말한 비밀인지 순간 헛갈렸다. 어느 쪽도 유쾌하게 떠벌리고 다닐 만한 사실은 아니었다.
05.
에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매니저를 바라본다. 그녀는 내려오는 밀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아이타치의 재롱(본의 아닌)에 숨죽여 웃고 있었다.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사람. 과연 누군가 사신들의 공통된 이상향처럼 만들고 싶을 만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에단의 검에 은총을 내리는 거룩한 신 외에 대체 누구에게 음울한 창조의 권리가 주어졌던가?
임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에단은 매니저에게 눈에 띄게 껄끄럽게 대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조금 어색해지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거의 사람이 바뀌어 버린 루이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누군가 나를 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 사랑받고 아끼고 싶은 욕망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그날은 루이가 매니저를 호위하게 되었다. 리히트가 평소처럼 아무렇잖게 찬사를 퍼부어도 루이는 마주 감동하며 (그래, 왕자에게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훌륭한 비유로다!) 몸을 배배 꼬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다만 이제 다들 변한 루이에게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해서, 이상한 눈으로 보는 대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다.
거대한 지상 고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고래는 족히 백 년은 묵었을 것 같은 해초며 기차 크기의 쇳덩이들을 물줄기와 함께 뿜어내 다들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에단은 부지런히 조원들의 행동을 좇았다. 한 명이라도 물줄기 가운데 낙오되면 큰일이다. 준은 무사했고 테오도 먼 데까지 도망친 것 같다. 루이… 루이와 매니저는 고래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무언가 기름통 같은 게 있었는지 물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 수 분의 일 초 간격을 두고 세찬 빗줄기 같은-폭발한 액체들이 사신들 위로 쏟아졌다. 에단은 주위에 있던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매니저 근처는 온통 불길이었다. 오도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본 에단이 걸음을 재촉했다. 고래는 지쳤고 사신들의 공격을 너무 많이 받았다. 그것은 마지막, 삭아 버린 닻 모양을 한 쇳덩이를 날린다.
쇳덩이는 중력 가속도를 받아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매니저를 향해 낙하한다. 어쩌면 그게 끝일지 모른다. 순식간에 소멸하기 직전. 에단은 엉뚱하게도 ‘그렇지만 엄밀히 죽는 건 아니야.’ 생각하고 만다. 그녀는, 기계니까.
루이가 그 앞에 뛰어들어 쇳덩이를 피하고 데굴데굴 굴러 퍽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매니저가 뒤늦게 비명을 지른다. 에단은 지금에야말로 뛰어가 매니저를 잡아챘다.
“루이!”
“루이 형님?!”
많은 목소리가 웅성댔다. 갑자기 귀가 멍했다. 루이는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었다. 매니저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나서 비틀대며 다가갔다. 그는 무언가에 옆구리가 뚫려 있었다. 얇은 철근이다. 사람이 그렇게 창백해질 수 있는지 에단은 처음 알았다.
“왜 그랬지?” 에단은 문득 중얼거린다. 우리는 분명 같은 생각을 했을 텐데? 그건… 마땅히 해야 하기 때문인가?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매니저가 어떤 무엇이건간에. 왜 그랬지? 에단은 고개를 깊이 숙여 루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가 들을 것처럼.
06.
매니저는 초조하게 팔짱을 끼고 있다가 에단이 다가가자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 특유의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에단은 잠시 말을 가다듬어야 했다. “좀… 어떤지.”
“십 분 전이랑 비슷해. 살겠지만 회복까지 조금 기다려야지.”
…내가 미안해. “그런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저라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에단은 짧게 대꾸했다. 매니저의 옷에는 아직 덜 닦인 피가 굳어져 있었다. 잔뜩 지친 얼굴은 금방에라도 쓰러질 것 같아,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아니야, 루이가 거기 없었어야 했어. 하필이면 또…”
가만, 에단은 병동의 은색 격리문을 뚫어져라 본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매니저도 아는가? 루이가 알고 에단이 아는 사실을?
에단은 갑자기 참을 수가 없어졌다. “매니저님도 압니까?”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점점 벌어지는 입을 보니 에단은 추측이 확신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
“당신은… 기계입니까?”
07.
“에단. 본래 알면 안 되는 건데.”
그녀는 어딘가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에단에게 급히 목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에단은 조금 참담해졌다.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왜냐면, 진실을 알더라도 대부분의 사신들은 여전히… 매니저는 에단의 손목을 잡고 코너를 돌았다.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다. “나도 안 지 얼마 안 돼. 냥선배님도 그렇고… 정말 미안해! 해결을 찾을 때까지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이해…합니다. 소란을 막는 편이 낫습니다. 에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매니저가 낯선 사람 같았다. 여전히 지키고 싶었지만, 또 얼마나 모르는 게 있는건지. 어떻게 ‘해결’한다는 말인지.
그런데, …조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이상하게 들은 걸까? 기계인 쪽은……
08.
시릴은 가장 좋아하는 안락의자에서 머릿속-체스를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각각 백과 흑을 나눠 이길 때까지 혼자 모든 수를 다 두는 것이다. 어떤 말이 어디 있는지 모두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게임이 망쳐지기 일쑤였다. 때문에 시릴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에단이 걸어오는 모습을 미처 못 보고,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따라와, 하고 끌려가는 동안 시릴은 이제 진짜 죽는 건가? ‘또’? 왜? 어째서? 도움의 요청을 보내 봤지만 에단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다들 ‘쟤가 뭔가 또 잘못했나보군…’ 하는 눈빛으로 보내 주었다. 아냐! 이번에야말로 뭔지 모르겠다고! 살려줘! 아니, 설마하니 내 풍선껌 발사기를 알아낸 건가?
에단은 서늘한, 의자 하나가 있는 방에 시릴을 던져 놓고 어두운 눈으로 노려본다. 시릴은 도망치려다 숨을 삼키며 의자까지 뒷걸음질쳐 주저앉았다. 망할 귀족! 훈련받았으면 다야? 에단이 천천히 다가왔다…
“소문은 왜 퍼뜨렸지.”
“무슨 소문?” (곤란하게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리 중에 기계가 있다는 소문.”
“아아… 그거?”
똑바로 대답해라. 갑자기 시릴의 발 옆에 구멍이 났다. 진짜 구멍이다! 지름은 십이 센티미터 가량에 깊이는… 시릴은 너무 긴장해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시릴은 두다다다 대답했다. 뭐야, 그건 최소한 헛소문은 아니었어! 진짜일 가능성이 있었다고, 나도 궁금해서 말해본 거야! 누가 피해라도 봤어?
“말해 봐라.” 에단이 칼을 검집에 넣었다. 시릴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내가 찾아낸 게 있어. 청월제 기간에 음향 기기를 정비하라길래 이참에 사신 지부의 전체 장비 상태를 점검하려고 했지. 메인 장치가 아무도 안 쓰는 창고에 있더라고. 거기서 어떻게 하다보니 다른 기계를 하나 찾았어. 내가 여태까지 본 거랑 완전 달랐지. 하지만 나는 천재거든. 어떤 걸 발명하겠다고 생각하면 스케치가 있기 마련이잖아. 내가 생각한… 그러니까 만약에, 인간의 많은 패러미터를 각각 변수로 한 기계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 성격을 바꾼다는 생각을 해 봤어? 좀더 순종적이라거나, 좀더 발랄하게 만들고 싶을 수도 있잖아? 처음에 설계도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기본적인 인간형 로봇이 작동한다는 전제 하에 말야. 그러면 로봇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본체가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거랑 비슷했어. 나라면 더 개선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단시간에 이해하기엔 좀 복잡했지. 그래서 몇 개만 건드려 봤을 뿐이야. 과학자라면 무릇 위험을 무릅쓰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전해보고 싶거든. 조금… 조금 ‘효율적으로’ 바꿔 봤지!
뭘 바꾼 거지?
몰라. 아마도 인간이라면, 대부분의 일처리가? 조작해야 하는 부분이 좀 많았지만. 아마 고장났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정도로 복잡한 기계라면 아마 정말 정교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 중에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아니었지만, 매니저는 아닌 거 알지? 그냥 소문이었어! 다시 말하지만 나도 궁금했다고?
에단은, 안경을 연신 치켜올리며 두서없이 떠는 시릴의 나머지 주절거림을 한 귀로 들으면서 매니저의 말을 떠올린다.
…그 때도, 청월제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도 루이가 이런 식으로 원혼의 공격을 막았어. 거의 소멸당할 만한 공격이었는데, 너희는 아마 몰랐을 거야… 그 때 봤어. 루이는… 죽지 않고 조금 망가진다는 걸. 루이도 몰랐던 것 같아.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텐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나도 몰라. 아마 그래서 지금도 똑같이 한 걸 거야. 이번에는,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그러면 안 돼. 에단. 인간이 그러면 안 되잖아. 루이한테 꼭 말해 줘. 의미 없지 않다고…. 나한텐 그런데, 너한테도 그렇지?
09.
루이는 눈을 떠서 천장을 본다. 몸이 으스러진 것 같다. 주위를 보기 위해 목을 돌리는 것조차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만 죽는 게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거긴 에단이 있었다. 알아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루이는 에단이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랬다간 부러졌던 곳이 다시 몽땅 어긋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루이는 괜찮다. 조금쯤 망가져도 대수롭지 않다. 인간이 아니니까.
“안녕, 그대.” 목소리는 오래 쓰지 않아서인지 조금 쉬어 있었다.
04-2.
그대 소원은 그대한테 얼마나 중요한가? 에단은 무슨 질문이 그따위냐는 얼굴을 해 보인다. 상당히. 꽤. 죽을 수도 있을만큼. 대답은 즉각적이고 솔직했다. 루이는 웃고 싶었다. 내 소원은 말이지. 사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 살아 있던 누군가의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이룰 수는 없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루이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다르고 어쩌면 원혼보다도 못한 어떤 것이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도 에단은 아무 말 않았다. 비밀을 말한 뒤로 조금은 생각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런 동정심을 가져주는 건 좋았다. 최소한…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그것을 위해 이 루이 왕자는 살고 싶다고 기계는 생각한다.
읽어주신 분들을 위한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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